"군부「쿠데타」가 두려웠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최근 미·소 양국이 결정적인 중대문제들을 다룰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는 사이에 출판된 「니키타·S·흐루시초프」 전 소련수상의 회고록 제2부는 현재 권좌에 앉은 소련지도자들의 속셈을 파악하는데 해명함과 놀라움을 동시에 주는 유익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녹음「테이프」로 1백 80시간 분에 해당하는 이 회고록은 1964년 「흐루시초프」의 실각이래 그의 회상을 담은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사회주의」라는 소련의 상표가 전 세계에 나돌 때까지는 끝없는 투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의심 많은 「크렘린」집단의 실태를 말해주고 있다.
이 책이 시사하는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흐루시초프」시대의 「크렘린」 지도자들은 「나폴레옹」식의 군사「쿠데타」가능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군부의 고위층 인물을 2차에 걸쳐 제거했다.
▲「흐루시초프」는 「피델·카스트로」로 하여금 「쿠바」에 공격용 핵「미사일」을 배치하는데 동의하도록 강요함으로써 핵전 일보전까지 몰고 갔던 1962년의 미·소 대립을 자초했다.
▲「흐루시초프」와 그의 동료들은 서방세계가 미국의 지도하에 항상 소련을 공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핵「미사일」만이 이를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믿었다.
▲「흐루시초프」는 당 및 정부수뇌로서 긴장완화제안을 늘 선전도구로만 사용했다.
소련 지도층은 소련주변의 공산위성국가들을 마치 그들이 소련의 이익만을 위해 존재하는 양 이용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흐루시초프」는 군부의 득세를 경계, 소련판 「나폴레옹」식 「쿠데타」가능성을 극히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1956년 해군사령관이었던 「N·G·쿠즈네초프」제독을, 그리고 1년 뒤에는 2차 대전 때 「베를린」입성의 영웅이었다는 당시 국방상 「게오르기·K·주코프」원수를 각각 『군부 내「나폴레옹」주의의 대두』를 막고 『남「아메리카」식 군사「쿠데타」의 요인』을 제거한다는 명목아래 숙청했다.
이처럼 「흐루시초프」가 여러 차례에 걸쳐 군부에 숙청을 가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으로 이는 소련의 민간출신 지도층이 군부의 정치적 득세를 두려워한다는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자신은 핵무기 실험을 중단해야 한다는 핵 물리학자 「안드레이·사하로프」의 호소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군국주의적 면모를 드러냈다.
당시 「사하로프」는 소련의 「가공할 핵무기」가 『소련에 대한 침략적 음모를 꾸미는 자들에게 도덕적 압력을 가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소련의 긴장완화 제안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었던가? 「흐루시초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를 동시에 해체하자고 제의한 뒤 1957년 중공의 모택동에게는 이러한 공개적인 제의가 단순히 『선전효과』를 노린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흐루시초프」의 공산권 위성국에 대한 무분별한 정책은 소련 지도자들의 전형적인 침략과 내정간섭방식을 대변한다.
「흐루시초프」는 임의로 위성국들의 국경을 바꾸고 정부지도자를 지명했으며 소련군 장성을 「폴란드」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가 하면 『반혁명적 소요 이후의 질서회복』이라는 구실 하에 「헝가리」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분명 「스탈린」의 면모는 「흐루시초프」와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다분히 도사리고 있었다. 「흐루시초프」 자신도 한때는 『「스탈린」이 나의 내면에서 트림을 하고 있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AP】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