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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8. 황사영 백서와 외세 (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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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국가를 넘어 개인의 인권이 보장되며, 민족을 넘어 타자(他者)와 함께 하는 삶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입니다. 학계의 논쟁거리 중 하나인 '황사영(黃嗣永.1775~1801) 백서(帛書) '는 이 화두를 풀어 나가는 데 좋은 거울이 됩니다.

'황사영 백서'는 국가와 개인의 갈등을 서양 문물 도입 초기에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노자 교수는 신앙의 자유를 내건 이 백서가 민족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 연대를 호소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변호합니다.

이에 반해 허동현 교수는 백서에 보이는 독선과 폭력을 지적하며 관용과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인권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면 외국의 군대 동원과 같은 폭력적 수단을 써도 좋은지 묻고 있습니다.

편집자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사건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을 자극하는 역사적 사건도 없을 겁니다.

"조선이 계속 신앙의 자유를 불허하면 청나라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해야 하며, 서양의 큰 배 수백척과 군대 5만~6만명을 보내 조선 조정을 위협해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게 해달라"는 내용의 백서를 중국 베이징(北京)의 가톨릭 주교에게 보내려 했던 것은, 당시 지식인은 물론 지금의 우리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합니다. 황사영의 인척이었던 다산 정약용(1762~1836)마저 황사영을 역적으로 매도하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훈련을 받았고, 불우한 근대사에서 외국 군대의 침입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임을 배운 우리 세대의 경우에는 황사영이 처한 딱한 상황을 이해한다 해도 그의 계획을 민족 반역 이상으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황사영이 민중을 혹사.착취했던 세도가들에게 맞섰음에도 남한의 민중 사학자들이나 북한 사학이 그를 맹목적인 사대주의자 내지 외세 의존적인 환상가라고 혹평하는 것도 바로 근대사의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 민족주의적 감정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황사영이 외세를 끌어들이려고 계획했다고 말할 때 하나의 커다란 허점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일찍이 한국 가톨릭 역사의 권위자인 조광(고려대.한국사) 교수도 지적했듯이 그 당시에는 황사영 등 박해받는 조선의 가톨릭 교도들이 끌어들일 만한 외세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프랑스 혁명(1789~1799)과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서 무력화돼 1801년 스스로가 반도의 괴수라 칭했던 나폴레옹과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 하는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었습니다.

교황청이나 서구 국가들이 청나라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주기를 바라고, 청나라가 신앙의 자유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은 황사영의 생각은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순진한 착각이었습니다.

그의 생각과 반대로 18세기 청나라의 역대 황제들은 제사를 금지시키려고 했던 교황청의 조치에 대로해 20만여명의 신자를 거느렸던 중국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탄압을 계속 강화했습니다.

특히 가경(嘉慶: 1796~1820) 연간의 박해가 심해 거물급 프랑스 선교사들이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교자의 최후를 맞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나 19세기 초반 조선의 가톨릭 탄압 정책의 상당 부분은 바로 청나라 금교(禁敎) 정책의 전례를 따른 것이기도 했지요.

제국주의 세력들이 총칼을 앞세워 중국에서 선교의 자유를 요구하게 된 것이 제1차 아편전쟁(1840~1842) 이후의 일이니, 그 전에 순교한 황사영을 외세 침략의 앞잡이로 보는 것은 엄청난 비약입니다. 설령 백서가 베이징의 가톨릭 주교에게 전해졌다 해도 죽어가는 조선 가톨릭의 처절한 외침에 응할 만한 외세는 사실 전무했습니다.

충청북도 제천 배론(舟論)의 토굴에 숨어 체포와 죽음을 앞두고 "큰 배들이 와서 이 박해를 멈추지 않는 한 조선의 교회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라는 절망 섞인 꿈을 꾸었던 천주교 청년 황사영.

청나라 정세나 서구 지리도 알지 못하면서 교황청과 청나라 황제를 세계의 중심이자 공평한 조정자로 -중세의 세계주의적.보편주의적 이상대로-인식했던 그의 몽상적인 신앙 자유의 획득 방안을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할 권리와 필요성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요?

그가 꿈꾸었던 큰 배 파견이나 조선에 대한 감독이 보편적인 정의를 대표하는 세계 중심(교황청.청나라)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면, 그의 절박한 절규는 요즘 식으로 보면 유엔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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