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서 하는 고생...안타까와 죽을지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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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니이가따」에서 열린 일본인처 자유왕래 실현을 위한 모임에 참가한 많은 일본인처 가족들과 직접 만나 그들의 말을 종합해 본 결과 북한에 간 일본인 처들은 ⓛ일본 안에서 한국인과 결혼한 것 때문에 심한 차별을 받았고 ②비교적 생활이 빈궁했으며 ③「북한이 낙원」이라는 선전에 현혹되어 간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일본인 처들의 대부분은 북한에 도착 직후 한 두번 소식을 전해왔을 뿐 10여년간 편지왕래가 두절된 상태이고, 직접 편지를 쓰지 못하고 대서시키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 하나의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본 기자가 이들 가족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옮겨보면
▲ 「가와마다」여사(58·가명·신나천현) = 자유왕래 실현을 위한 움직임을 충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것이 결실되어 북한에 있는 딸애가 일본에 돌아올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15년 전 장녀인 딸애가 남편을 따라 북한을 간 후 딱 한번 보내온 편지를 보면 손자들이 「껌」「초컬릿」·연필·지우개 등을 보내달라는 얘기가 있었다. 봉투에 쓰여진 주소를 보면 황해남도 장연군에 있는 광산공무에서 일하는 것으로 돼있고 북한의 우표가 붙어있었다.
이 편지 이후에 부탁한 물건을 보냈는데도 소식이 없다.
▲「이모도」여사 (40·가명·신석시)= 61년에 어머니가 동생 셋을 데리고 북한에 갔다. 7남매 중에 장성한 네 사람만 일본에 남고 어린 동생 셋만 데리고 가셨는데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머니하고 동생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니이가따」항에서 헤어질 때 서로 얼마나 울었는지 손수건이 흥건히 젖었다.
하루빨리 어머니와 동생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와까바야시」여사(34·가명·배해도)=나는 5형제 중에 막내인데 언니들이 남편을 따라 북한에 갔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두 언니가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 왔는데 집안이 가난해서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해주고 있는 동안에 편지를 남겨두고 북한으로 떠났다. 편지내용을 보면 결코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애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간다고 돼있다. 언니들 생각하면 지금도 잠을 못 이룬다. 남편이 직장에 나가고 애들도 있어 대회장에 나오기 어려우나 언니들 생각에 견딜 수 없어 달려왔다. 소식만이라도 알고싶다.
▲「미끼꼬」여사(29·가명·신석시)= 8형제 중에 맏언니가 북한에 갔다. 지금도 1년에 한두번 편지가 온다. 일본말로는 편지를 못쓰게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언니가 남편이 가는데 생이별을 하면 애들 장래가 곤란하고, 남편이 일본에서 제대로 직장도 못 가졌기 때문에 따라간다고 했다. 물건을 보내달라는 편지도 있었다.
이쪽에서 보낸 편지는 곧 도착하는 모양인데 북한에서 오는 것은 매우 느렸다. 물건을 보냈는데도 받았다는 이야기가 없을 적이 많았다. 언니가 공산주의자라서 북한에 간 것은 아니다.
▲「사또」여사(가명·신석시) =고모가 북한에 간 후에 두 세번 편지가 왔고 그 후에는 소식이 없다. 그 동안 잘 있는 줄 알았는데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모두가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일본에 그냥 있었다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데 왜가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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