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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내린 「진산 시대」<2>|파동과 기복의 야당 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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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진산의 정치력엔 파동과 기복, 그 굽이서의 영욕이 얼룩져 있다. 생애의 파란은 숙명이기도 했는지 소년 시절부터 순탄치 못했다.
진산은 경성 고보서 교실에 「독립 만세」란 벽보를 붙인 일로 퇴학당해 보성 고보로 옮겼고 「와세다」 대학도 3년만에 중퇴, 중국으로 망명했다.
일경에 잡혀 압송돼 옥고를 치르고 나와서도 「쌍엽 농민회」「흥국회」등 항일 운동을 하다 해방 후 청년 운동에 투신했던 일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의 정당 활동은 51년 당시 민국당 사무 총장이던 유석의 권유로 민국당 총무 부장을 밭은데서부터지만 제자리를 잡은 것은 54년 3대 국회에 진출해서부터다.

<유석 막료로 역량 발휘>
3대 국회 말 당내 반대, 특히 신파의 제명 위협과 여론의 거센 매질을 무릅쓰고 유석이 「협상 선거법」 처리를 결행했을 때 진산은 구파 안에서조차 소수파가 된 유석 편에 확고히 섰다. 그런 일이 계기가 돼 당시의 구파 참모 계산 (소선규씨 아호)을 제치고 유석의 제1막료로 올라섰고, 4대 국회에선 신파의 오위영씨를 누르고 민주당 원내 총무로 선출돼 그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총무로서 겪은 첫 시련은 58년의 「24 보안법 파동」.
의사당 농성을 지휘하다 무술 경위들에 모두 끌려나가 법안 저지 투쟁이 어이없이 좌절된 뒤 그는 『강경 일변도의 전략은 결국 무위에 그칠 뿐』이라는 자가 비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후 진산은 이재학씨 등 자유당 온건파를 상대역으로 한 구파 쪽의 모사로 전면에 나섰다.
24 파동 후의 극한 대립을 풀기 위해 이기붕씨에게 밀서를 보낸 일. 59년 운석 (장면씨 아호)을 누르고 유석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뒤 「메디컬·센터」서의 조병옥-이기붕 면담을 주선, 이승만과 조병옥 간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던 일. 이런 것들이 협상파였던 구파 쪽 모사로서의 그의 면모였고, 아슬아슬한 비밀 협상이었지만 투쟁적이던 유석의 큰 그릇 때문에 신파 화살의 과녁은 되었지만 야합이라는 불신이나 오해는 사지 않았다.
「월터리드」 미 육군 병원서 서거한 유석을 수유리 묘소에 묻고 나오면서 진산은 말도 활동도 없던 당시의 민주당 최고 위원 윤보선씨에게 다가가 『이제 해위가 구파를 맡아야겠소』라는 귀엣말을 했다. 이로부터 구파 전열은 김도연·소선규를 누르고 해위·진산 「라인」로 짜여져 갔다.
4·19후 대통령직은 차지했으나 정권 투쟁에서 신파에 무릎을 굽힌 뒤 진산은 구파를 신민당으로 갈라 나오는 분당 주역이긴 했어도 신민당의 간사장으로 장면 정권에도 반대당의 협조자 역을 감당해 나갔다.

<"호남선 열차서 잠자">
그는 부총리 겸 내무 장관 제의는 거절했지만 윤보선·장면·곽상훈·유진산 4자 청와대 회담을 거쳐 구파 5부 장관을 인선, 입각하게 했다.
계속되는 「데모」로 집권 몇개월까지도 안정을 굳히지 못하는 장 정권을 위해 장 총리를 숙소이던 반도 「호텔」로 찾아가 「비상 시국 선언」을 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그가 5·16을 맞은 곳은 외유 중 「마닐라」서였다. 그는 바로 귀국했지만 5개월간 영어의 몸이 됐다.
그는 풀려 나와 자택에 반 연금 상태에 있으면서도 윤보선·윤제술씨간 비밀 연락을 하며 군정 이후의 대비에 골몰했다.
그는 이 연락망을 통해 해위에게 우리는 정정법에 묶였지만 막후에서 돕겠으니 민정의 기수로 앞장 설 것을 권유했다. 병상의 윤제술씨까지 안국동을 다녀오고도 신통한 회답이 없자 10월 비가 오는 어느 날 땅거미가 질 무렵 넝마주이로 변장, 스스로 안국동 8번지의 문을 두들겼던 일은 공개되지 않았던 비화.
정치 활동이 재개되자 표면적 본부는 안국동 8번지. 전략 본부는 혜화동 정해영씨 집으로 한 구파의 재기 투쟁이 시작됐다.
진산은 혜화동의 보료 상석에 앉아 안국동에 전략을 상달하고 작전을 지휘했다.
김병로·윤보선·이인·전진한 4자 회담을 통해 4파 안배 원칙이 고수된 민정당 창당 작업에 구파를 무소속으로 교묘히 들여보냄으로써 구파 압도의 민정당으로 창당해 낸 것도 그의 솜씨였다.
3·16 군정 연장 성명이 나왔을 때 종로 백조「그릴」에 약혼식을 위장, 감쪽같이 「민주 구국 선언 대회」를 열고 벌인 군정하 최초의 「데모」도 진산 주도하에 이뤄졌다.
그러나 그 무렵 진산 반대자들은 『해위는 호남선 열차 (금산을 호남으로 간주한 말)에서 잠을 잔다』고 그의 독주에 반발했고, 끝내는 소선규씨 등이 민정당을 탈당하는 이른바 「계산 파동」을 겪어야 했다.
불운은 잇달아 그의 그는 또 한 차례 「국민의당 파동」을 겪고 해위와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정정법의 단계적 해제는 통합 야당에 장애가 돼 민정의 통합 야당 꿈은 무너지고 민주·신정 (허정씨를 중심)·민우 (이범석씨 중심)로 4분됐다.
군정의 야당 단일화 압력까지 겹쳐 추진된 것이 민정·신정·민우 3당을 묶는 「국민의 당」창당 작업.
순탄하게 진행되던 통합 창당 작업은 그러나 윤보선·허정간 대통령 후보 경쟁으로 지명 대회가 수라장이 돼 깨지고 말았다.
당시 지명 대회를 투표로 치렀다면 윤씨 지명이 결정적이었으나 신정계를 자처하는 1백명 대의원이 폭력으로 표결을 방해했다.

<묵계설·총리 밀약설도>
두 차례 회의가 수라장 속에 유회된 뒤 안국동 8번지서 열린 해위 막료진 회의에서 진산은 『국민의 당 창당을 성공시키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면서 해위의 후보 경쟁 후퇴를 제의했지만 해위와 다른 모든 막료들의 빗발 같은 항의에 부닥쳐 빛을 보지 못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안국동에서 「진산 묵계설」이 흘러 나왔다. 진산이 우양 (허정씨 아호)으로부터 3억을 받기로 했고 집권하면 총리 자리를 밀약 받아 해위를 배반했다는 것이다.
당시 후보 조정 작업에서 대통령을 맡지 않은 정파에 당수와 총리를 안배키로 해 「총리 밀약설」은 그럴듯한 얘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허정씨 쪽 상대역이던 이상철씨는 두 사람 모두 내심으론 후보보다 당권에 매력을 느꼈다고 했고, 진산은 「국민의 당」을 창당, 야당 통합을 이룩하는 것이 강력한 후보보다 군정 종식을 위해 더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 소신이었다고 회고했다.
해위의 눈에 나 그의 당직은 당무 위원직뿐이었지만 2인자의 실력은 흔들리지 않았고 해위의 강경 노선에 「브레이크」를 거는 온건파의 「리더」로 버티어 갔다.
그러다 63년의 6·3 학생 「데모」로 선포된 계엄령 해제를 위한 여야 협상 뒤에 세칭 「진산 파동」에 다시 휩쓸리게 됐다.
2개월의 협상 끝에 여야는 「언론 윤리 위원회 법」과 「학원 보호 법」의 두 보장 입법을 전제로 국회가 계엄 해제를 건의키로 타결을 봤다.

<"진산관 당 할 수 없다">
그러나 당내 강경파가 반대하고 언론 윤리위 법 통과를 계기로 모든 언론 기관이 항의에 나선 가운데 해위가 협상의 책임을 진산에 돌려 포문을 열었다.
정해영씨가 맞대 놓고 『저 「사꾸라」가 당을 망친다』고 소리치고 해위는 『「스탈린」과 당을 할지라도 진산과는 당을 못한다』고 선언, 진산 제명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로부터 2개월 당 감찰위→당무 회의→소속 의원 제명 서명→중앙 상위→중앙위로 일진일퇴의 진흙탕 싸움 끝에 진산은 제명 당했다. 그 위에 진산은 「사꾸라」라는 누명까지 겹쳐 쓰고 말았다. 「해위와 진산은 주장이 달랐다. 해위는 원내외를 통한 투쟁을 강조했고, 진산은 의회를 통해 남아 있는 군정의 색깔을 지워 「민주 궤도」로 끌어넣어야 한다고 했다.
해위는 『협상 과정에서 진산에 정치 자금이 전달 됐다는 심증을 굳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했고 진산은 『협상 대표도 아니었던 내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구한말적 모해 정치」의 표본』이라고 항변했지만 세론은 진산 편에 서 주지 않았다.
그는 거의 재기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민정·민주 양당의 통합에 손을 뻗쳐 박순천씨의 민주계와 연합, 해위를 통합 야당의 당수 경쟁서 밀어내고 통합 야당의 2인자로 재기했고 정상을 향해 뜀박질하는 무서운 저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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