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연의 의미|김형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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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교향악 운동에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지휘자의 확보, 연주 기능의 향상, 연주 「레퍼토리」의 확대, 악기의 개량, 단원의 보수, 재원의 확보, 대부분 행정기관에 묶여 있는 현 국내 교향 악단의 합리적인 운영을 위한 제도적 개선 등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에서도 연구 작품의 폭을 넓히는 작업도 시급한 과제의 하나다.
과거 국내 교향 악단이 거의 고전과 낭만물, 그것도 통속적으로 알려진 극히 제한된 작품에 한정돼 왔다는 사실은 「레퍼터리」의 다양화와 작품의 시대적 배려에서 폭을 넓혀야 한다는 후진성의 극복에 과감하지 못한 증좌이기도 하다.
또 「모차르트」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브람스」 등의 극한된 취향에서 탈피, 근대·현대 작품, 또는 고전 이전의 작품 등으로 다극화는 물론 고전물이나 낭만물 중에서도 이를테면 아직 국내에서 연주되지 않는 「브루크너」나 「말러」 등의 교향곡도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 근래 국립 교향 악단과 서울 시립 교향 악단 등 국내 양대 교향 악단에서 새로운 「레퍼토리」의 이른바 「국내 초연」이란 의욕을 보여 주목을 끈다. 국립 교향 악단 제1백24회 정기 연주회 (지휘 홍연택)에서 「말러」의 『교향곡 제2번 부활』이 이정희·김복희·국립 합창단의 노래를 곁들여 초연 되었다. 이날은 이정희의 정취 어린 노래로 같은 「말러」의 연가곡 『잃은 아이를 위한 노래』를 연주, 모두 「말러」의 작품만을 선택했다.
지금까지 「말러」의 교향곡이 잘 연주되지 않는 이유의 하나가 이 제2번도 1시간20분 걸리거니와, 거의가 1시간이 넘는 대곡들이라는데 있다. 그러나 초연곡에 따르기 마련인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는 청중들의 표정과 낮선 곡에 대한 연주상의 산만성을 배제할 수 없었지만 곡취의 윤곽을 살린 성과는 있었다.
서울 시립 교향 악단 제1백91회 경기 연주회 (지휘 정재동)에서도 「러시아」의 작곡가 「보로딘」의 『교향곡 제2번』과 국내 창작곡으로 백병동의 『관현악을 위한 정취』가 초연 되었다. 「보로딘」은 색채감은 부족하지만 초연곡으로서는 비교적 박력과 음향이 풍부한 연주였다.
특수한 작품도 아닌 이미 역사적으로 평가된 작품으로 구미 악단에서 자주 연주되는 곡목들이 때늦게 연주 소개된다는 것은 후진적인 현실이지만 문제는 국내 작품이 청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창작곡이 낯설기 마련이고 더우기 난해한 작곡 기법상의 추세는 현대 작품의 공통된 생리이기도 하지만 요는 자주 연주하고 얼마만큼 성실하게 작품을 연주하느냐이다.
작곡계의 부진이 과거 연주계가 국내 작품을 경시하고 소외해 온 결과라고 한다면 근래 창작곡을 잇따라 초연한 의욕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국향 제1백23회 정기에서 「한국 작곡가의 반」을 마련한 것은 작곡계에 크나큰 자극이 될뿐더러 악천 풍토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고 본다.
초연은 아니지만 희귀한 연주로 전 서울 시향의 상임이던 김만복의 오랜만의 객원 지휘 서울 시향 제1백92회 정기를 들 수 있다. 「비에냐프스키」의 『「바이얼린」 협주곡 제2번』을 독주한 김희수의 유화한 음감이 아쉽기는 하지만 뛰어난 기교력과 견고한 구성력을 가진 연주를 곁들인 이날 연주회에서 1961년이래 두번째로 「코플랜드」의 무용조곡 『로데오』가 흥겨운 「재즈·스타일」로 연주되었다.
새로운 작품들을 다채롭게 연주 소개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청중의 음악적 취향과 교양을 계몽 확대시키는 일은 좋은 일이나 작품을 바르게 해석, 작품성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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