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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규원<시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어느 시대·어떤 국면에서나 자기확인의 작업이란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존재 태의 하나이다. 그것은 진실에 대한 우리의 끝없는 애정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라는 한 개인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필문과 응답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결코 그것은 빌어 온 관념이나 이상으로 추구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극단적인 권익편중의 사고가 진실한 가치세계를 도식적으로 유도하려 하는 무서운 이 시대에 있어서의 그러한 작업이란 적지 않은 희극적 자조감까지 느끼게 한다.
이 달에 발표된 장영수의『미합중국에게』외 4편(문학과 지성), 윤상봉의『불행한 피』(심상), 전봉건의『말』(현대문학)은 자기확인의 세계란 얼마나 처절한 아름다움인가를 그리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룰 보여주며 김대규의『이분법』(월간중앙)은 도시적 사고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김대규의『이분법』은 두 손을 틀고 죽은 한 병사의 죽음을 통하여 편리한 사고·이분법적 사고의 무서움을 극대화한다. <두 손을 쳐든 채>죽은 병사의 손을 두고 한 사람은<만세>였음을, 한 사람은<백기>였음을 각각 강조하는 구문이 그것이다. 그런 사고의 횡행이 손을 하나씩 각기 찢어 간다는 비극적 결구는, 그러므로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시의 평면화를 유도하는 이<너무나 당연함>의 논리에 쉽게 귀착함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 타당한 논리가 아니라 그 논리의 힘과 생명이기 때문이다.
전봉건의『말』은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지만 밝혀지기를 거부하는 만큼 강력한 힘으로 그의 삶을 있게 하는 존재로서의 말(언어)에 대한 집요한 추적이다.
무엇보다도 확실하면서 동시에 무엇보다도 불확실한 사물인 언어에 대한 집착은, 그러므로 자기를 명확히 해보려는 노력의 집적이다. 그의 시의 아름다움은 이 끝없는 투쟁의 행간에 스며든 고뇌의 다른 이름이다. 작품에 나타난 말, 즉 그의 삶의 현대양태 인 말의 실상은<어둠 속에 서 있는> 그것의 상태이다. 이 점은「말·4」「말·5」「말·6」「말·8」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시의 표면에 어둠과 눈, 어둠과 봄, 어둠과 꽃, 어둠과 핏덩이 등으로 매우 대조적인 명암으로 그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는 사물들은, 그러나 곧 그것이 그림자라는 점이 밝혀진다. 즉 현실적으로 어둠 속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이 평범한 사실이, 그 사물들이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윤상봉의『불행한 피』의<천년을 뚫고 가던 한 노랫소리>는 전봉건에게 있어서의 말과 동가의 것이다. 그가 자기를 정립하고 또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선택한 방법적인, 삶밖에 없다. 그것은 수 천년을 연연히 우리의 가슴에 흐르고 있을 한 노랫소리의 재생이란 시인으로서의 방법적인 사랑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누구보다도 확고한 삶의 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상의 공간에 머무르고 있다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서 자기확인의 한 극단적인 노력인 자학이 빚어내는 비극적 아름다움이 탄생한다. <늦 가을비 되어 상수리나무 욋가지를 적시다가 님의 발등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된 옛 노래자이(가척)의 외마딧 소리 어이하리, 쫓기고 쫓기어 네 속에 푸르게 떨고 있는가>와 같은 가구는 그러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방법적인 삶이란 항상 획일할 될 위험성을 짙게 지니고 있다. 그 방법이 명백하면 할수록 더욱 그렇다고 그의 다음 작품『사랑』을 읽을 때 우리가 두려워할 문제란 그것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장영수의『미합중국에게』외 4편은 길들여지지 않은 감수성, 그 야성에 의한 사구가 자기와 남의 세계를 얼마나 솔직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접근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치악산2』가 그 좋은 예이다.
사실 잘 길들여진 감수성이란 대부분의 경우 안일주의의 기술에 불과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에 화해함으로써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화해란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긴 하지만 쉽게 해결하는 기술이란 오히려 진실을 감추는데 공헌하기 십상이다. 우리가 그러한 감수성을 기피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에게는 우선 모든 삶이 왜곡되지 앉은 원형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섣불리 작정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은 채 싱싱하게 살아 있다. 이 점온 한 시인이 자기를 획득하는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가 쉽사리 어떤 관념을 획득하려는 기도를 우리는 거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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