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국민을 안심시킬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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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불안하다. 달러.금 사재기 현상이 일어나고, 해외 이주나 유학을 서두르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심지어 국내에선 생소한 방탄복에 대한 관심도 늘어난다는 보도도 있다. 해외 관광객이 크게 줄고, 한국 근무나 출장을 기피하는 외국인이 많다고 한다.

미국.캐나다에 있는 자녀나 친척들로부터 걱정 전화가 쏟아진 것은 벌써 오래 됐다. "6월께 한국에 큰 일이 난다고 야단들인데 괜찮으세요?" "어떻게든 일본까지만 나올 궁리를 하세요"하는 따위의 전화가 폭주했다. 소비.투자.주가하락도 불안 탓이 크다.

*** 정부가 불안요인 안만들어야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간단하다. 우리 사회가 이처럼 불안이란 커다란 도전을 받고 있는데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응전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제시함으로써 국민을 안심시킬 책임은 당연히 정부의 몫이 크다. 그러나 새 정부의 응전은 서툴거나 미약하고, 심지어 정부 스스로가 불안의 원천 노릇을 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가령 달러 사재기 현상이 일어나면 "국민 여러분,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정부를 믿으세요"하는 메시지가 당연히 나와야 할 게 아닌가. 외국인의 한국 방문 기피에 대해서도 "한국은 안전합니다"라고 만회하려는 다각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국민이 불안해하든 말든 가만 있는 정부는 책임을 다하는 정부일 수 없는 것이다. CNN의 손지애(孫智愛)서울지국장이 한 신문에 쓴 글을 보면 북한 핵에 대한 새 정부의 목소리가 너무 미약해 세계 언론에 한국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한국에 부정적인 기사가 많이 나간다고 했다.

사실 盧정부는 북한 핵에 대해 '불(不)용납'과 '평화 해결' 두가지를 말하고 있지만 평화 해결의 방법이 무엇인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대책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정부의 이런 태도에 국민이 안심할 수 있을까. 더구나 외국 정부나 외국인이 안심할 수 있을까.

미국 정찰기에 북한 전투기가 15m까지 접근, 위협한 것은 정말 아찔한 사건이었다. 당연히 북한에 대해 즉각 유감 표명과 자제를 촉구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첫 반응은 미국에 대한 자제 촉구였다. 盧대통령은 사건 당시 때마침 있었던 영국 신문과의 회견에서 "예견된 일"이라며 미국이 너무 나가지 말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국방부의 대북 성명은 사건 후 닷새 만에야 나왔다. 이런 일을 보고 국내든 국외든 불안해할까, 한결 든든하게 생각할까.

북핵 문제뿐 아니라 정부의 잦은 말바꾸기와 돌발적 언행도 불안의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예컨대 대북 뒷돈 주기 의혹에 대한 특검조사가 그렇다. 결국 盧대통령이 받아들이긴 했지만 입장 변화가 너무 심했다. 당초 '철저 규명'에서 '국회 판단 존중'으로, 다시 '수정 협상'으로 바뀌었고 그때마다 정치권이 시끄러웠다. 교육부총리는 임명되자마자 요란하게 발언하더니 그 중 몇가지를 스스로 주워담았고, 법인세율 인하를 경제부총리가 밝힌 것을 대통령이 뒤집는 식이었다. 국정원장은 처음엔 실무형 기용을 말하더니 얼마 후 거물.정치인기용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실무형으로 돌아온 것 같다.

*** 예측가능.신뢰감 주는 정치를

게다가 집권 측은 말을 몹시 험하게 한다. 盧대통령은 평검사와의 토론 후 "이번에 검찰을 꽉 쥐었다"고 했다. 대통령이 검찰을 꽉 쥐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교육부총리는 취임식에서 "교육부가 장관을 뺑뺑이 돌리고 바지저고리를 만드는 곳"이라고 했다. 여당 사무총장은 검찰에 전화를 걸어 기업 수사 외압 논란을 일으킨 후 "맷집이 좋아 아직 건재하다"고 했다.

한마디로 집권 측의 담론(談論)수준이 걱정스럽다. 어린 세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렵다. 이런 식으로 말이 자주 바뀌고 험한 말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예측 가능성.신뢰감이 나오기는 어렵다. 정부의 오늘 말이 내일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불안이 안 생길 수 없다.

지금은 정말 안팎으로 어려운 때다. 국민은 불안하고 의욕은 떨어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국민을 안심시키고 사기를 올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좀 더 사려 깊고 예측 가능하며 어른스러운 정부의 모습이 절실하다.
송진혁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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