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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영화 등서 사투리 득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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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무으따 아이가, 고마해라." (2001년 영화 '친구', 관객동원 8백만명, 역대 흥행 1위)

"그려, 우리 집안 다 깡패여, 그랑께, 좋게 얘기할 때 ○○○ 닥쳐라 잉, 좍 찢어불기 전에." (2002년 영화 '가문의 영광', 관객동원 5백만명, 2002년 흥행 1위)

"내 아를 나아도.""음마, 거시기 허요." (2003년 KBS-2TV '개그콘서트', 시청률 오락부문 1위, 종합부문 5위권)

사투리가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다. TV에서, 영화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너도 나도 사투리다. 사투리 한 두 마디를 쓰지 않으면 주목받을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생긴 듯하다. 새 정부 들어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 말씨가 대 유행이다. 개그맨 김상태나 배칠수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맞습니다, 맞고요"를 연발한다.

표준어만 사용해야하는 줄 알았던 프로그램 MC도 예외가 아니다. 씨름선수 출신인 강호동의 빠르고 억센 사투리를 남성성의 상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영남지역 대학가를 주름잡던 이벤트 사회자 김제동은 각종 방송 프로그램의 패널리스트로 등장하며 자신의 영역을 급속도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북한 사투리를 쓰는 '꽃봉오리 예술단'과 옌볜 사투리의 강성범을 스타로 키워낸 '개그콘서트'의 강영원 책임PD는 "'생활사투리'코너의 경우 경원하던 사투리를 배워 본다는 새로운 포맷이 시청자들에게 어필한 것 같다"며 인기원인을 분석했다.

사투리가 웃음의 실마리가 되는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문화평론가 김지룡씨는 "일본의 코미디는 오사카 사투리로 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고 전한다.

사회흐름을 반영하는 충무로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투리를 '흥행 포인트'로 삼은 작품들이 속속 등장할 예정이다.

5월 크랭크인 하는 '황산벌'(감독 이준익, 제작 씨네월드)은 백제 계백 장군과 신라 김유신 장군의 황산벌 전투를 양국의 질펀한 사투리 대결로 그려내겠다는 야심작이다. 오랜만에 충무로로 돌아온 박중훈이 계백을, '달마야 놀자'의 정진영이 김유신을 맡았다.

28일 개봉하는 '선생 김봉두'(감독 장규성, 제작 ㈜좋은 영화)는 강원도 오지 분교로 부임하게 된 구악(舊惡)교사(차승원)의 얘기다. 그를 정화시키는 것은 순박한 마음이 담긴 강원도 사투리다. 한창 촬영 중인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감독 오종록, 제작 ㈜팝콘필름)에서 차태현은 걸쭉한 부산 사투리로 사랑을 쟁취한다.

사투리의 '득세'는 김대중 정부 이후 본격화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동안 차별받았다고 생각한 호남 사투리가 여기 저기서 크게 들리고, 이에 따라 영남 사투리도 목소리를 높이면서 상승작용을 불렀다는 풀이다. '조직 폭력배'가 등장하는 영화와 코미디가 인기를 끈 것도 이같은 현상에 한몫했다.

사투리의 강점은 우선 친밀감을 준다는 것이다. 지역민들에게는 강한 연대감을 준다. 자신들의 언어를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일종의 쾌감도 부여한다. 그래서 폐쇄적이기도 하다. 서로의 사정을 잘 이해하다 보니 모호한 단어를 구사해도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다. 영남에서 길을 물어보면 "요래 요래 요래 가면 됩니더"라고 한다거나 호남에서 "거시기 했남" "그럼 거시기 혀" 하는 식이다.

둘째로 후련함이다. 민초들의 생활어로 자리해온 사투리는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이 많다. "문디 자슥""이 잡것이"같은 육두문자도 가감없이 표시된다. 그런 말은 카타르시스로 작용한다.

DJ 목소리를 흉내낸 방송인 배칠수가 부시와의 가상 통화로 네티즌 사이에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던 것도 이런 속성이 작용했다.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일탈문화는 주류(主流).정통(正統)문화와의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사투리 열풍을 진단한다. 최근 사회 곳곳에서 급격한 변화가 진행되면서 주류문화에 대한 반(反)문화가 사투리를 통해 표출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권위주의적 문화아래서 다들 정장차림으로 점잔만 빼다가 갑자기 청바지를 입고 온 사람에게 시선이 몰리는 격이지요. 하지만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청바지가 돋보이기 위해서는 대부분 정장을 입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모두 청바지를 입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버리죠. 우리 사회에는 정장과 청바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그는 "일탈 문화는 주류에 대한 견제나 탈출구에 그쳐야지, 그것이 주류가 되고자 하면 문화의 퇴보가 시작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 교수는 진지하고 학문적인 용어가 오히려 웃음의 소재가 되기 시작한 데서 일탈문화 과잉의 조짐을 본다. 사투리로 대표되는 하위 문화가 생명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정통 주류문화 역시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정통성에 바탕한, 제대로 된 문화가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고 여기에 더 큰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사투리 열풍'의 역설적 교훈이다.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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