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제10화 고구려의 유적 남긴 팔호 타구|제3장 동북지방의 한적 문화 탐방(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팔호 신라신사의 예제 행사인 기마타구는 영락없이 전회에서 언급한 한국의 민속놀이 장치기 그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도보 대신 말이 동원되고, 경기자들이 일본「사무라이」 (무사)의 치장을 하여 놀이 자체가 짙은 일본적 향토색을 띈 것이 다르다 고나 할까.
예제가 행해지는 8월22일, 신사경내는 문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8월의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어 아침부터 참기 어려울 만큼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넓은 경내는 꾸역꾸역 모여든 남녀노소의 구경꾼들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대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이윽고 딱딱딱 딩둥댕 딩둥댕 땅땅땅 땅땅땅하는 박자목, 북(대고), 총소리들이 쉴새 없이 울려 퍼지고, 거기에 간간이 섞여 귓전을 때리는 째질 듯 한 말(마)들의 울부짖음이「코러스」를 이루고 있었다.

<경기는 팀 나눠 4명씩>
기마타구의 경기「룰」은 곧 말 타고 하는「필드·하키」라고 생각하면 된다. 홍백 두「팀」으로 나뉜 4명씩 도합 8명의기사들이 각기 자기「팀」의 상징인 붉고 흰 초립(진립) 과 어깨띠를 두른 성장으로 말에 탄 채 경기장에 들어선다. 이윽고 양「팀」은 북소리·종소리에 맞춰 경기장 잔디 위에 한 줄로 깔린 각기 4개씩의 홍구·백구를 마상에서 장대로 굴려, 자기편「게이트」(구문)로 골인시키는 것이다.
백「팀」의 흰 공 하나가 흰 장막을 친백「팀」의「게이트」에 굴러들어 갈 때마다 요란한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또 홍「팀」의 빨간 공이 홍「팀」의「게이트」에 들어 갈 때면 이번에는 북 대신 종소리가 요란하다. 이리하여 4개의 공을 먼저 다 집어넣은「팀」이 이기는 것이지만, 이런 경기를 3회 내지 4회 되풀이해서 최종승리「팀」이 결정된다.
그들이 이런 경기를 굳이「가하미류」라 하여 제법 그럴싸한 격식의 무술경기로 명명한데는 물론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백50년 전 룰 정해 개발>
팔호 신라신사에 전승돼 내려오는 이 같은 경기에 엄격한「룰」을 정해, 거기 따른 독특한 마술을 개발한 것이 지금부터 약 1백50년 전(1820년대) 이곳 팔호반 제8대 영주인 남부신진공이 체계화한「가하미류 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고시대 이래 이곳 동북지방의 팔호에 이 같은 마술이 성행하게된 내력 역시 알고 보면 한국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곳 신라신사는 본래 일본 관동지방의 산악지대인 「야마나시」현으로부터 옮겨진 것인데, 그곳은 바로 고구려를 거쳐 건너간 몽고계의 준마들을 키우는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북방 기마 민족의 일본 원주민족 정복 설이 말해주고 있는 바와 같이, 옛날 준마를 가진 부족이나 민족들과 그러지 못한 집단들과의 관계는 마치 오늘의 기갑부대를 가진 군대와 그렇지 못한 군대 사이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 전국시대에 전설적인 많은 일화를 남긴 일본의 명마들-「도끼구로」·「이께쓰끼」등이 모두 이곳 팔호 지방에서 사육된 이른바「남베고마」들이었다는 사실과 이 준마들을 조련함으로써 발달한 독특한 무술경기가 바로 그 남부 구를 중심으로 한「가하미류부전팔호기마타구」의 원류라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동북지방엔 한국 성도>
요컨대 한국은 일본 동북지방의 이 오지에 일본 전체를 그 말굽아래 습복 시킨 준마들의 종마들을 보내주고 그 말들을 타고 싸우는 무술경기의 원형까지 전해준 것이나 다름없다.
팔호기마타구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암강풍마 교수(54·홍전 대학·체육학)는 이 사정을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이곳 신라신사의 기마타구 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피 속에도 옛 한국과의 맥락이 연결돼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북지방 주민들 가운데는 분명히 한국계 자손들인 김·곤·금씨 등 외자 성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데, 이들은 모두 한국의 금성(일본말로는 김·곤·금을 비슷하게「깅」또는「공」으로 읽는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특수한 기능을 소유한 사람들로서 초청에 의해 직접 건너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안조 말기(11세기 초) 일본을 주름 잡던 권문「미나모또」(원) 씨족(그 자손들은 후일 모두 황족과 귀족이 되었다) 내의 무장 원뢰의와 더불어 지장으로 이름 있던 장수가 바로 이곳 출신의 김위시 이었다는 것도 일본의 시대소설에 자주 나오는 얘깁니다(이에 관해서는 김정주 편『한래문화의 후영』하권 P288참조).

<5세기 페르샤서 시작>
또 전국시대의 무장 가운데 후세 사람들에게 가장 깊은 감동적인 일화를 많이 남긴 상삼겸신의 군기에는 단 한자「곤」이라는 글씨를 염색해서 썼던 것인데 이게 또한 멀리 인도에서 당나라와 고려를 거쳐 전승된 군신 마리지천의「심벌」이이었음도 후세의 연구로 밝혀졌습니다.>
인구 약 16만 명의 조용한 교육도시 홍전시의 자택으로 찾아간 기자를 맞아 팔호기마타구에 관한 연구에 일생을 바친 암강풍마 교수는 두꺼운 안경너머로 이렇게 서두를 끄집어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타구의 역사는 아주 오래된 것으로서 기원전 5∼6세기께「페르샤」(지금의「이란)에서부터 발상 됐다고 한다. 이 타구경기가 중문에 전해진 것은 3세기께 이른바 「실크·로드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일본에는 이른바「아쓰까」시대로부터 나라시대에 걸쳐 축국의 형식으로 전해진 것인데 그 수입처가 바로 한국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해준다.
따라서 이 놀이가 일본에 처음 수입되었을 때에는 말아닌. 도보로 하는「가찌다뀨」였고, 그것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월 궁중행사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것이 평안시대(794∼1188)에 이르러 처음으로 발달하게된 마술의 보급과 더불어 무사계급간의 오락경기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