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콰잘린 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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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태평양전쟁의 전격지인 사이판 섬을 두루 다녀보고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마리애나」해구를 거처 「콰잘린」섬으로 향했다. 짙푸른 바다에 도사린 낮선 녹색 섬들을 하나하나 찾는 여행이란 수많은 여자들을 농락하는 「돈판」과도 같다고나 할까. 모든 섬들이 사랑하는 임처럼 느껴지는 것은 임시 홀아비인 나만이 느끼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문명이 아니라 원시 속에 파묻힌 세계의 섬들을 사랑했다는 불세출의 독일시인 「링겔나츠」가 문득 생각난다.
얼마를 달리고 있을 때 기장이 「스피커」를 통하여 『여러분 어서 바다를 내려다보십시오. 지금 매혹의 섬 「투르크」를 지나고 있읍니다』하고 시정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모두들 참가로 달려가는데 나도 쏜살같이 남의 자리 옆의 창으로 달러가 아래를 내려다보려다가 어떤 귀부인과 머리를 부딪쳤다. 이런 실례가 어디 있으랴만 이 부인은 「모나·리자」의 그 신비의 미소 못지 않은 우아한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양보했다.
이 인연으로 급히 인사를 나누고는 내가 도리어 기사도 아닌 화랑정신으로 창문을 양보했더니 『나보다는 당신이 더 필요하실 테니 어서 잘 보시고 사진도 찍으세요』하는 친절을 베풀어주는 것이 아닌가. 나만이 보기가 겸연쩍어서 자꾸만 사양했더니 『그럼 함께 보시면 되겠네요』하며 눈짓을 한다. 좁은 창문으로 둘이 함게 보자니 머리가 또 맞닿았다.
그러나 뗄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투르크」섬이 꿈나라처럼 보일 뿐 아니라 그 섬 둘레의 바닷빛이 연색 숲과 대조를 이루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고스란히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원죄 이전의 「에덴」의 조감도였다. 이 부인은 내가 따를 수 없을만큼 풍부한 문학적인 표현으로 이 「투르크」섬을 관찰하며 말을 건네왔다
이런 것이 다 국제적인 사교의 멋이 아닐까? 동성끼리도 국제적인 우정은 크나큰 기쁨을 자아내는데 하물며 아리따운 이성임에랴. 더구나 짙으면서도 야하지 않은 향수냄세가 이상하게도 나의 온 몸을 감도는 것이 부인과 함께 「투르크」섬을 내려다보면서 세계의 아름다운자연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 섬 둘레의 얕은 바닷가에는 뒤집힌 여러 척의 선박이 보였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의 공중공격을 받고 쓰러진 일본 배였다. 이 배만 없다면 태고적의 바다와 다름없을 이 「투르크」 섬의 아름다움을 보며 고대에의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련만….
특히 태평양 적도지역의 산호초 섬들은 화산도와는 달리 낮기 때문에 공중에서 내려다 보면 지금 막 바닷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번 남태평양 여행에서 꼭 들르려던 「포나페」섬을 지나갈 때는 몹시 서운했다. 이 「포나페」섬의 추장 아들이 우리 나라를 찾아왔을 때 나에게 꼭 찾아 달라고 했었는데 선로로 말미암은 여정의 변경으로 들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국제적인 우정보다 더 강렬한 사랑이 없는데 사정으로 들르지 못하는 이 아쉬움을 어디다 비하랴. 이것은 여행하는 사람이 더 간절히 느끼는 심정이다.
태평양에는 섬들이 하늘의 성좌처럼 수없이 있지만 워낙 바다가 넓은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푸른 바다뿐이다. 「콰잘린」섬에 여객기가 이르렀을 때 내려다보니 아담하기 그지 없는 섬인데 공항에 가까와지니 미끈한 활주로가 쭉 뻗어있는데 이 둘레에는 최신 기재들이 보인다. 이곳은 다름 아닌 미국NASA의 태평양지역 인공위성 추적지였다.
미국의 신탁통치지로서 푸른바탕에 6개 지역을 나타낸 여섯 별이 박힌 깃발이 나부끼고 그 좌우엔 「유엔」기와 미국의 성조기가 나란히 나부끼고 있다.
그런데 여객기가 머무르는 동안 내려주는가 했더니 통과객은 대기실에도 못나가게 하였다. 어쩔 수 없이 비행기 안에서 밖을 내다보니 거인이 출국관리를 직접 맞고 있는데 출입국 절차는 굉장히 까다로운 것 같앗다. 이 「콰잘린」섬은 중부 태평양 「마셜」제도 서쪽 「라리크」 열도중의 경초이다.
작은 경초들이 많이 이어 붙어서 둘레를 이루고 있는데 「스케일」이 이 어찌나 큰지 안쪽의 가장 넓은 폭이 25㎞이며, 길이는 1백10여㎞의 넓은 양항이다. 일본의 위임 통치령으로 있다가 제 2차대전 때 미국의 신탁 통치령으로 되었는데 미 해군의 항공기지로서 큰 구시을 하고 있다. 이 섬도 이른바 전쟁의 신이 다스리는 곳이건만 「에덴」으로 느껴지는 것은 웬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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