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이외수 소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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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강원도 화천군 ‘감성마을’에서 만난 이외수씨는 ‘슬픔 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고통 없이 영그는 열매가 어디 있으랴’는 자작시도 읊었다. 동영상은 joongang.co.kr [장진영 기자]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 박재삼(1933~97)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제 나이 투명한 스무 살 때부터 가슴속에 놀빛 울음의 강 하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입니다.

 이 세상을 떠도는 사랑 얘기들은 왜 그리 서럽고 아리기만 했던지요.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언제나 저는 그 강물의 놀빛 울음소리를 듣곤 했습니다. 특히 가난한 시절에는 사랑마저도 죄가 되지요. 세월이 흐를수록 천형 같은 상처만 깊어집니다.

 온 세상 푸르던 젊은 날에는 가난에 사랑도 박탈당하고 역마살로 한 세상 떠돌았지요. 걸음마다 그리운 이름들 떠올라서 하늘을 쳐다보면 눈시울이 젖었지요. 생각하면 부질없이 나이만 먹었습니다. 하지만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아직도 제 가슴속에 놀빛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며칠만 기다리면 설입니다. 마침내 제 나이는 고희로 접어듭니다.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수첩에 적혀 있던 이름들은 거의가 삭제되었거나 소식이 두절되었습니다.

 올해도 저는 음복 몇 잔에 혼곤하게 취해서 이 세상 서럽고 시리기만 한 사랑 얘기를 흥얼거리며, 허청허청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으로 걸어 들어가겠지요. 제 영혼 온통 놀빛으로 물들겠지요.

이외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