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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도소 수감 된 해적 5명 이야기 들어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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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도소에서 한국말을 배우고 있는 마호메드 아라이. [사진제공=JTBC]

2011년 1월.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하고 선원들을 감금ㆍ폭행했던 해적 중 5명이 아덴만 여명 작전 때 생포돼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다. 당시 석해균 선장에게 총을 쏘는 등 수 차례 위해를 가했던 마호메드 아라이(26)는 무기징역, 아울 브랄렛(22)은 15년형, 압디하드 아만알리(24)ㆍ압둘라 알리(26)는 13년형, 압둘라 후세인 마하무드(23)는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햇수로 교도소에서의 한국 생활 4년차에 접어든 해적 5인과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이들중 가장 중형을 선고받은 아라이를 포함해 몇이 귀화를 원한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초 면회 취재를 요청했으나 법무부는 검토 끝에 ‘이들에 대한 국민 감정이 악화되는 등 사회에 좋지 않은 여론이 조성될 수도 있다'며 불허했다. 다음은 해적들과의 일문 일답

-한국 교도소에서의 생활은.
“잘 지내고 있다. 나는 소말리아에서 교도소를 지키는 군인이었다. 소말리아 교도소에서는 수용자가 씻는 것은 물론 이발이나 손발톱을 깎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천막생활을 하면서 힘든 노역을 한다. 그에 비해 한국 교도소는 시설이나 처우가 무척 좋다."(아만알리)
"밥도 맛있고 교도소에서 많이 배려해준다. 이슬람 신자로서 하루 다섯 번 기도해야하는데 작업장에서 기도 시간이 되면 잠시 작업을 멈추고 기도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정말 감사하다.”(아라이)

-하루 일과는.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 알라신에게 기도하고 아침을 먹은 뒤 오전 8시부터 작업장에서 일을 한다. 점심 기도와 오후 기도를 하고 난 뒤 오후 6시에 작업을 마친다. 틈틈이 한글교육반에서 1년 반동안 한국어 말하기와 쓰기 기초를 배웠고 작업장에서도 한국 수용자들이 한국말을 친절하게 잘 가르쳐줘서 많이 배웠다. 지금은 어렵지 않은 말은 알아듣고 답할 수 있다."(아라이)

-여가시간에는 무엇을 하나.
“텔레비전에서 한국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사극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기황후’(MBC)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아라이)
"저는 거실에서 기도를 하거나 TV를 본다. 한국 가요 K-POP 중에서는 ‘여러분’(임재범)을 무척 좋아한다." (브랄렛)
"나는 한국 민요 아리랑이 좋더라."(아라이)

-이슬람교 신자인데 한국 음식은 잘 맞는가.
“한국 음식은 무척 맛있다.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생선튀김과 생선조림이고 오징어와 오뎅 등 생선을 즐겨 먹는다. 김치는 맵기는 하지만 물에 씻어 맛있게 먹고 있다. 이슬람교에서 금한 돼지고기가 들어간 음식은 안 먹는다. 교도소에서 주는 식사에서 돼지고기를 빼고 이슬람 식단에 맞춰 먹도록 노력한다. 매점에서 돈을 주고 훈제닭과 커피, 우유, 마른 오징어를 사먹기도 한다. 작년까지는 훈제닭을 즐겨먹었는데 앞으로는 이슬람식으로 도축하지 않은 소, 닭 등 모든 고기류는 안 먹을 생각이다. 식사를 할 때면 문득문득 소말리아에서 굶고 지낼 우리 아이들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곤 한다."(아라이)

-아덴만 일대에서 왜 해적질을 했는가.
“소말리아에서 직업군인이었는데 한 달에 한국돈으로 5만원 가량 받았다. 군인 월급으로는 일곱 식구를 먹여살릴 수 없었지만 다른 할 만한 일이 없었다. 아이들을 굶기는 것이 아빠로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돈을 많이 준다는 해적회사의 제안에 해적선을 타게 됐다. 삼호주얼리호가 첫 해적일이었다."(아만알리)

"소말리아 내전 때 아버지가 총에 맞아 돌아가시고 먹고 살길이 없어 버스 운전을 했는데 월급을 거의 못 받았다. 그러다가 버스가 고장이 나면서 할 일도 없어 해적이 됐다. 나도 삼호주얼리호가 첫 해적일이었다."(브랄렛)

"원래 소말리아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는데 하루종일 열심히 일해도 수입이 너무 적어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첫번째 부인은 돈을 잘 못 벌어온다고 나를 떠났다.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처자식을 자주 굶기다보니 지금 부인도 떠나버릴 것 같았다. 어느날 해적 회사에서 사람이 찾아와 해적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말해줘서 해적일을 하게 됐다."(아라이)

-이곳에 있으면서 가장 힘든 건.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다. 교도소에서 허가해줘 아내와 형에게 전화를 하곤 했는데 2012년 2월 통화 후 아내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 소말리아는 우편이 없고 집주소도 없어서 휴대폰이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너무 답답하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도 한국에 남고 싶다. 한국은 인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배려한다. 하지만 소말리아는 정부가 없고 치안이 불안해 돌아가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게 해준다고 해도 소말리아 가족들, 특히 아이들 때문에 고민이다."(아라이)

"가족들만 데려올 수 있다면 귀화하고 싶다. 하지만 가족들 없이 혼자 남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밤마다 가족들이 생각나서 눈물이 난다. 해적일을 하러 바다에 나가있는 동안 아내가 낳은 아이는 잘 크고 있는지, 굶어죽지는 않았는지, 다른 부족에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돼서 종종 잠을 자기가 어렵다."(아만알리)
"저는 한국이 허락만 해준다면 소말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고 싶다."(브랄렛)

-불편한 건 없나.
“소말리아는 항상 더운데 한국은 겨울이 있어 힘들다. 한국에서 맞는 겨울은 아직도 익숙하지가 않다. 추위가 너무 싫고 힘들다. 방에서 잘 때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을 잔다."(아만알리)
"겨울 추위다. 한국에 온지 4년째이지만 여전히 겨울 추위는 고통스럽고 힘들다. 눈을 처음 봤을 때는 신기했는데 지금은 눈만 봐도 춥다."(아라이)

-형기를 마치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소말리아로 돌아가면 할 일이 없을 것 같지만 해적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 기술을 배워서 한국의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싶다."(아라이)

"한국에서 가족들과 살게 된다면 지금 배우는 신발 만드는 일도 좋고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아만알리)

-삼호주얼리호에서 당신들이 억류했던 석해균 선장의 소식은 들었나?
”석해균 선장의 소식은 TV에서 여러 번 봤다. 살아났다는 소식을 보고 무척 기뻤다.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석 선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잘못을 빌고 싶다. 다른 선원들 모두에게도 용서해달라고 빌고 싶다." (아라이 등 일동)

-한국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감사를 전하고 싶은 분들이 많다. 외부에서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 넣어준 영치금으로 운동화도 사서 신고 있다. 신발이 좋아서 신기가 편하다. 우리를 호송했던 해군이나 이곳 교도소 직원들도 우리를 모두 신사적으로 대해주고 있어 고맙다. 억울한 건 없다. 단지 당시 사건에서 사망한 한국 사람이 없고 우리는 전문 해적이 아니라 적은 돈만 받고 승선한 고용 직원일 뿐이니 한국인들이 이런 점을 고려해주셨으면 좋겠다. 배가 고파서 해적일을 했지만 큰 잘못을 했다. 그런데도 접견 와서 위로해주시고 영치금을 넣어주셔서 크게 감동했다. 한국 국민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아라이 등 일동)

법무부에 따르면 이들은 처음 교도소에 들어왔을 때보다 몸무게가 10㎏ 가까이 늘어나는 등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 교도소 관계자는 “이곳에 수감된 다른 한국인들과의 관계도 좋다”고 말했다.

유성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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