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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에의 꿈」을 키운다|「불모」를 「농토」로 바꾼 새마을 그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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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왕손부락 휩쓴 새마을바람|충북 중원군 주덕면 풍덕마을>【주덕=김순현기자】「새마을」의 꽃은 왕손마을에서 남몰래 먼저 피어났다. 충북 중원군 주덕면 제내리 두덕마을-.
이태조 맏아들 방우의 후손 덕량이 임난때 피신하면서(3백80년전) 이루어진 고사의 마을로 주민 77가구중 단 한 가구 박상번씨(41) 집을 제외한 나머지 76가구가 모두 할아버지·중조할아버지·손자·고손자·조카뻘인 덕량의 7대∼14대 자손들이다.
학덕이란 마을 이름도 방우묘소가 있는 개성 풍덕의 지명을 따온 것.
옛날 꿈을 먹으며 헛된 세월속에 사그러들기만 하던 이 마을에「새마을」의 바람이 분지도 3년.
무사태평을 말해주던 초가는 어느새 단아한 꽃무늬「슬레이트」로, 앞뒤 민 동산은 짙푸른 숲으로 뒤바뀌었고, 거기에 도정공장·비료·양곡창고·소방 및 농기구창고·마을회관·구판장·양어장·숲속의 어린이 놀이터가 늘어선 새 면모는 흡사 서구 전원을 옮겨다 놓은 것 같다. 아름답기만 한 4세기만의 탈바꿈.
덕량의 10대 손이자 이장인 이세영씨(47)가 도정공장을 짓자고 처음 새마을을 서두르던 때만해도 마을의 공기는 차가왔다.
『새까만 후손이 웃 어른 보고 이러자, 저러자는 소리가 도대체 무엄하다』는 손위의 호통뿐. 항렬이 절대였던 당시로서는 당연한 반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반발은 이씨가 문전옥답 5백평을 팔아 10만원을 기금으로 먼저 내놓자 5명의 친척이 5만원씩 25만원을 잇따라 내놓는 뜻밖의 협동「무드」를 조성했다. 이것이 자립의 서곡.
지체만 따지던 묵은 꿈을 깨어나 새마을 깃발아래 뭉친 마을 사람들은 집안마을을 이룩한다는 일념으로 마침내 각종 자립시설을 거뜬히 갖춰「기초」에서「자조」를 껑충 뛰어넘은 자랑스런 월반마을이 됐다. 개덕마을의 공동 연수입은 약70만원. 벌써 목욕탕은 무료로 운영하며, 고무신 등 모든 생필품은 도맷값에 10원만 얹어 공급되는 살기좋은 마을이 됐다. 겨울 농촌의 걱정거리 연로는 앞선 조림으로 완전 해결된 것은 물론이다.
이제 마을 사람들의 소망은 자꾸만 오르는 생필품 구매가격을 안정시켜 달라는 바람뿐이다.

<땀과 협동으로 부촌 이룩|북제주군 조천면 신촌마을등>
【제주=신상범기자】「탐나」의 후예. 북제주군 조부면 신촌·신여·감덕 마을사람들이「자립에의 꿈」을 키우며 기적을 쌓고 있다. 남에게 뒤질세라 피와 땀을 흘리며 마을을 가꾸기 2년여. 여느 도시에 못지 않은 새마을, 부촌으로 탈바꿈해 놓았다. 감귤숲 사이로 포장길이 뻗어났고 전기시설·TV·전화·공원 등 문화시설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다.
이곳은 제주에서도 가장 길이 나쁘다고 소문났던 제주시에서 동으로 12km지점-. 1천66가구 4천6백80여 주민이 4개 자연부락에 흩어져 조상이 물려준 돌밭에서 늘어날 줄 모르는 농사에 매달리거나 찌그러진 범선으로 생계를 이어왔던 곳.
그러나 농장을 경영하던 김희수씨(47·새마을「협동상」수상자)가 발벗고 나서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72년2월. 『남이 하는 일을 우리라고 못할 것이 뭐냐』며 김씨는 앞장섰다. 마을 이장직을 맡고 마을청년회·부인회 등을 설득, 끈질긴 대화끝에 실마리를 잡았다.
처음 시작한 일이 부서진 선착장 1백m의 보수공사. 10일남짓 동안에 일이 끝났다. 먼발치에서 남의 일처럼 넘겨만 보던 사람들이 삽을 들고 나섰다. 이때부터 2년 동안은 땀이 있을 뿐이었다.
일은 시작이 멀다하고 차근차근 끝나갔다. 주민들 힘만으로 어려운 것은 길 문제였다. 조금만 해풍에도 먼지가 하늘을 가리는 노폭 2∼3m의 좁은 길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마을사람들의 소망은 멀리 일본으로 메아리쳐 갔다.
이곳 출신 재일교포 현창무씨(60·대판시) 김민도씨(50) 한응택씨(50) 등이 이 소식을 듣고「포장추진위원회」를 만들어 73년7월 58명의 교포가 성금1천1백61만원을 모아 보내왔다. 마을 사람들은 1백만원을 거둬 보태고 밤낮 없는 공사가 시작됐다. 5천5백m의 마을 안길이 모두 포장된 것이다. 마을안 길이 1백% 포장돼 3개년 계휙이던 것이 반년만에 끝난 것이었다.
소 1백59마리, 말 2백1마리, 돼지 8백마리의 축산이 이뤄지고 동력선 3척 및 범선 15척이 건조됐으며 감귤재배 1백80km, 공동목장 2천km등의 농장이 일구어졌다. TV 80대, 전화 87대에 「라디오」는 모든 가구에 마련되었다.
이장 김씨는『마을의 감귤생산 연 수입이 6천만원, 축산 1천만원, 어업 8백8만원의 소득을 올리게 됐다』며 『올부터는 더욱 바빠지게 됐다』고 너털 웃음을 웃었다.

<고냉지대를 옥토로 바꿔|강원도 정선군 남면 유평1리>
【정선=조정희기자】감자와 무성귀가 고작이던 산꼴 마을이 연간 가구당 소득 2백만원을 넘는 부촌으로 자라 지난해에는 전국 최우수 새마을로 지정돼 상을 받았다.
강원도 정선군 남면 유평1이. 군청소재지인 정선에서 24km. 면 소재지에서도 14km나 떨어진 이 마을은 해발 6백m의 고냉지대이다.
주민은 1백4가구 6백30명. 1백10ha의 화전에 매달러 감자·옥수수 등의 작물재배로 살아왔다.
이 마을에 새마을 운동이 인 것은 정부에서 새마을사업을 벌이기 7년전인 64년6월부터였다.
그러니까 올해로 꼭 10년이 되는 셈이다.
당시 김주복씨(36) 등 5명의 마을청년이 군에서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왔었다 살림은 가난해 술집이 있고 노름만이 있었다.
김씨등은『우리 힘으로 잘살아 보자』에「유평1리 개발위윈회」를 조직한 것이 새마을 운동의 처음이었다.
첫사업이 술·도박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약간의 부작용이 있기는 했지만, 자치규약을 만들고 부녀회를 꾸며 1년만에 술과 도박을 강제 추방하는데 성공했었다.
여기서 아낀 돈이 70년까지 5만원. 둘쨋번 사업이 70년에 시작한 2.5km의 농로 뚫기였다.마을 사람들은 고개너머 7km의 먼 긴을 돌아 6만 정보의 밭을 개간했으나 오가는데 반나절이 걸려 산을 뚫어 곧잘 길을 낸 것이다. 2년의 세월이 걸러 71년10월에 너비 5m, 길이 2.5km의 길이 완성되었는데 공사도중 암벽이 막히면 소나 돼지를 내다 말아 폭파용 화약을 사 들였었다.
이 길이 뚫리자 6만평의 밭에는 고냉지채소와 마늘·고추 등 특용작물을 재배했다. 질이 좋아 서울에서의 판로가 틔는데 따라 72, 73년의 농가소득이 2백만원을 기록한 것. 하면 된다는 자신과 71년3월부터 시작된 정부의 새마을운동의「시맨트」지원으로 주민들은 마을앞 지장천과 소마평에 2개의 다리를 놓았고 전기를 끌어들여 이미 81가구가 전화됐고 온 마을에 간이 상수도가 들어갔다.
이밖에 제방 4백43m, 조림 1만1천7백20그루, 지봉개량 76채, 암거 1개소, 유실수 1천4백20그루, 마을안길 4백m 등 71년부터 3년간 47건의 각종 공사로 마을의 모습이 옛과 달라졌다. 정선군 새마을과장 연규모씨는 이 마을은 바로「새마을 운동의 선구」라고 자랑하고있다. 지금 이곳 주민의 소원은「셀러리」등 고등소채의 재배를 위한 자금과 기술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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