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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연습(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A 저 바깥 구조는 어떻지?
B 뜰로 통해 곧장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야. 큰 장애물도 없어 담만 넘으면 그만이야.
A 자 서둘러.
(A 구멍으로 기어 들어간다. B도 기어들어 가려한다)
A (밖에서 소리만) 넌 저 쪽을 막아!
B 이거 낭팬 걸…. 7년 이상을 아무 실수 없이 일해 왔는데…어째 패가 시원치 않더라.
(문을 연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 돌아선다) 7년 이상을 아무 실수 없이 일해 왔는데…(서성거린다)
저 밖은…저 밖은….
가만있자, 뜰로 통하던가?…창고로 통하던가?…송장이나 다름없는 놈이 발을 묶어 놓더니 이번엔 아예 목을 거는군. 뜰로 통하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구멍 저 편에서 깡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곧 이어 비명 소리가 들린다. 잠시 침묵. B 구멍 속으로 급히 간다. 살핀다.)
B (구멍에다 대고) 어이 어떻게 된 거야…어떻게 된 거야?
A ……
B 어떻게 된 거야?
A (밖에서) 고이 모시도록 해-
(구멍으로 K 들어선다. A 따라 들어온다).
B (K의 따귀를 때리며) 자식!
가긴 어딜 간다고…그래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애 나간 거야?
A (발로 차며) 네놈 덕분에 네발로 기어 개구멍을 빠져 다니는 영광을 얻었다. 네발로… 개처럼 네발로 말이다.
B 난 이 송장이 내 목에 오라를 거는 줄 알았네.
A (손을 털고 바지를 털며) 재수가 없으려니…(웃으며) 앞으로 이력서에 한 줄을 더 써 넣어야겠어. 1974년×월×일 나 강무는 송장 덕분에 개처럼 네 발로 기어 다녔다, 이렇게.(한 동안 웃는다)
B 그래 어떻게 잡았나? 어디까지 갔었어?
A 가긴 제가 어딜 가.
B 뜰로 내달리지 않던가?
A 뜰? 그런 건 없어.
B 없어? 그럼 뜰이 없고 담이던가?
A 담도 없어.
B 그럼 그 밖이 뭐 던가?
A 콘크리트 덩어리가 있더군
B 콘크리트 덩어리?
A 콘크리트 벽이야. 여기하고 같은 콘크리트 벽이더군.
B 콘크리트 벽? (돌아보며) 이게 이중 콘크리트 벽이란 말인가?
A …
B (의문을 가지고) 이중 콘크리트 벽?
A 하지만 벽과 벽 사이는 공간이 있어. (방을 돌아보며) 이 정도 넓지는 않지만 약간의 공간이….
B 그래? (의문을 가지고) 내가 기억하기론 저 구멍 뒤쪽으론 뜰이 있고 뜰 저쪽으로 담이 있었는데…보스는 항상 그 뜰에다 사나운 개를 묶어놨었어. 내 기억이 틀림없을 거야. 아주 사나운 개.
A (날카롭게) 개는 없대두…. 뜰도 없어.
B 그럼 내 기억이 틀리나? 우리가 필요한 인물을 감금시키는 방이 여기 뿐인가? 다른 곳도 있잖아! 다른 곳으로 착각하고 있는 게로군.
B 그럴 수도 있겠군. 이런 곳이 여러 군데였으니까.
A (신이 나서 자랑한다) 들어보게나. 내가 이 구멍으로 기어 들어가자 이놈은 변소 같은 곳으로 뛰더군. 계속 쫓아갔지. 순간 조용해지는 거야. 그래 이상하다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더니 도망가길 포기하고 앉아 있더군.
포기하지 않을 수 있나. 벽이 가로막고 있는 걸. 그래도 이놈은 마지막에 내 얼굴을 향해 꽁치를 던졌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막다른 골목에 가면 생쥐도 고양이한테 덤벼드는 법이거든.
B 꽁치?
A 그래 꽁치.
B…
(침묵)
B (다시 의문에 잠겨) 뜰이 없어? 내 기억이 틀리지 않을텐데….
A (신경질적으로) 벽이야 벽. 뜰이 없대도.
B 그럼 개조한 모양이지? 누가 살 건가? 누가 여기서 살 건가? 언제 마쳤을까? 자넨 들은 적 없나?
A 뭘?
B 고친다는 소릴. 대원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보스의 입에서 그런 말하는걸 못 들었나?
A 집어치워! 그게 무슨 상관이야.
고쳤으면 고친거고 안 고쳤으면 안 고친거지, 밖이 뜰이건 벽이건 우리에게 무슨 상관있나?
B …. (생각에 잠긴다)
B 비명소리는 뭐지?
A 비명소리?
B 그래 비명소리.
A 난 기억이 없는데.
B 그래? 자네가 저 구멍으로 따라 들어간 후 곧 들렸는데.
A 그래? 금시초문인걸….(잠시)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긴장을 했어서 기억을 못하는지도 모르지.
B 그럼 깡통소리는?
A 깡통소리…. 아, 깡통소리 말인가? 깡통소린 났지. 깡통이 있었으니까.
B 그럼 쓰레기 더미인 모양이지?
A 어디가?
B 구멍 저 쪽이 말이야.
A 아니. 쓰레기 더미가 아니었어.
B 그럼 왜 깡통이 널려 있는 거지?
A 자네가 봤어? 널려있는지?
B 널려 있길래 발에 밟혔던 게 아냐?
A 난 발로 깡통을 밟았단 말을 하지 않았어.
B 그럼?
A 그냥 깡통이 있다고 했을뿐야.
B 아‥그랬던가?
A 저 밖은 쓰레기 더미가 쌓인 쓰레기장이 아니고 부엌이야.
B 부엌?
A 부엌.
B (혼자 궁리한다) 부엌…부엌이라. 언제 개조를 했군.
왜 부엌을 만들었을까?
(뭘 생각해 낸 듯 갑자기) 아…자네 변소 같다고 했지?…
변소 같은 곳으로 저놈을 추격했다고 했지.
A 그래 변소였어.
B (갑자기 시무룩해지며) 변소-
왜 변소를 만들었을까. 변소와 부엌….
A 왜 그러는 거야?
B 어느 정도지?
A 뭐가? 이 친구 영 알 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는데, 뭐가 어느 정도야 뭐가?
B 변소와 부엌의 규모.
A 엉성하지 뭐. 자넨 어느 일류 호텔의 식당이나 변소처럼 호화판인줄 알았나. 이런 눅눅한 창고 구석에 만든 변소와 부엌이 오죽하겠나. 간이용이지 간이용이야, 출출해서? 뭘 먹고 싶어 그러나?
B 아니….
A 간이용이긴 하나 충분한 음식이 비치되어 있는 것 같더군. 물론 모두 깡통 음식이야. 깡통, 아까 이놈이 내게 꽁치를 던졌다고 했지? 엄격하게 말해서 꽁치가 아니었어. 깡통이었어, 깡통. 깡통이 벽에 맞아 던지는데 보니까 내용물이 꽁치더군.
(B 침대에 와 앉는다)
A 일어나게. 거긴 자네 침대가 아냐. 이놈을 앉히도록 해야지. 자식, 멀지않아 죽을 놈이지만 그래도 귀엽단 말야.
B (혼잣말) 우리더러 먹으라는 건가?….
A …어 그런지도 모르겠군.
그럴 거야, 보스는 항상 관대하니까. 우리들에게만은 관대했지.
B 그럼?
A 그럼?….
B 장기전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A 장기전?
B 이놈에 대한 처단이 하루 이틀 내로 끝나는 게 아닌가 보지? 그러니 이놈을 감시하는 동안 계속 먹고 싸라는 소린 것 같은데.
A 그렇진 않을 거야. 만약 그렇다면 그는 우리에게 그걸 암시했을 텐데.
B 만약 여러 날을 두고 이놈을 감시하라면…. 정말 송장하나가 산 두 사람의 발목을 묶는군.
네놈 하나 때문에 우리가 잡혀 있어야만 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어처구니가 없어.
A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군.
마치 서로 감시당하는 느낌이야. (웃으며) 이거 정말 코미디인데. (단서를 풀듯) 두 사나이는 한 놈을 감금시켜 놓고 감시한다. 하나 실상은 두 사나이가 한 놈한테 감시당하는 격이 된다. (킬킬거린다)
B 집어치워!
A (아직도 킬킬거리며) 웃긴 웃는다만 기분 나쁜 코미디야. 진흙탕 속에서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듯한 코미디군.
(웃음을 그친다. 정색하고 남의 일 같지가 않군.)
B 남의 일?
A …(서로 쏘아본다) (B 의자에 앉는다. A, K를 침대에서 내려놓고 자기가 앉는다. 한동안 음울한 침묵이 계속된다)
B 계속할까?
A …
(B 의자에서 일어난다.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본다. 일어서서 움직인다. 직각의 벽 모서리에 가 기재고 서서 침대쪽을 바라본다.
A는 오른손 주먹으로 편 왼손 바닥을 천천히 다지 듯 친다. 이들 행동의 권태로움은 점점 가중된다.)
A 기분 나쁜 코미디야. (사이)
B 프로판 개스의 고무 호스가 낡았던데. (사이)
A 습기가 차서 으스스한데. (사이)
B 자네 침대 소리 좀 삐그덕 거리지 말게. (사이)
A 내 예기를 듣고 있는 거야?
B …
A 난 나 혼자 하는 얘기야….
(침대에서 일어나 의자를 구멍 앞으로 옮긴 후 앉는다)
B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지 집어내어 살펴본 후 훅 분다) 땅콩껍질과 담배가루야…
담배가루를 주머니 속에 떨어뜨리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을 했건만…. (또 본다) 땅콩껍질은 주머니 속을 더럽히지 않지만 담배가루는 지저분하거든…. (하품한다) 지이미…답답하지 않아?
교대로 ,나가 바람이나 쐬고 올까?
A (일어서며) 이거 골치 아픈 걸.
골치 아픈 게 걸렸어.
B 이런 화창한 날씨에 송장을 끼고 앉았으니….
A 더구나 옛 동료를….
B 한잔 생각 없나? 자식들은 지금쯤 몰려 앉아 계집 궁둥이를 주무르며 한잔씩 기울이고 있을 텐데….
A 큰일인 걸 빨리 다음 지시가 있어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란 말인가. 죽이라든가 아니면 어떻게 하라든가.
(항변하듯) 뭐야 이 꼴이 방화라든가 살인이라든가 뭐, 큼직한 걸 맡기지 않고 이런걸 맡겼으니 우린 송사리 대원도 아니요, 벌써 7, 8년씩 일해 온 노장들인데.
B 이상하지 않아?
A (날카롭게) 뭐가?
B 왜 하필 우리에게 이 일을 맡겼을까?
B 우릴 불신하는 건 아닐까?
A 하긴…요사이 눈치가…. 생각해 볼 문제군. (팔짱을 끼고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깨물며 서성거린다) 불신…생각해 볼 문제야…. (갑자기) 아 차… 몇 시지? 몇 시야?
B 왜 그러는 거야?
A 밖에 약속이 있는데… 몇 시야?
B (손목시계를 본다) 4시40분.
A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군…. 시곌 이리 줘.
B 시곌?
A 시계 이리 내!. (B 시계를 풀어준다)
A (시계를 자기 손목에 차며) 한시간 후엔…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앤데…기가 막혀, 기가 막히단 말이야. 며칠 전 호젓한 곳에서 단둘이 만났었지. 호숫가에 있는 술집…그런데 불현듯 보스가 나타났더군. 사업차 내려왔다가 머리도 식힐 겸 들렀다는 거야. 정말이지 날 그런 곳에서, 더구나 미녀와 함께 있는걸 만날 줄은 뜻밖이었다는 거야.
B 정말 뜻밖이었을까?
A ……?
B 정말 뜻밖이었겠느냐구.
A …….
(시계를 보며) 정확한 시간이겠지?
B 으…정확한 시간. (사이)
그런데 이상한 건 내가 식사를 12시10분쯤에 했다는 사실이야. 12시10분에….
A 무슨 대답이 그래?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냐고 묻는데.
B 왜 자네도 잘 알지? 난 추위나 더위·악취 졸음 등 모든 악조건에 강하지만 배고픔은 못 참는단 말이야. 그래 시간이 여의치 못함을 알 땐 휴대용 햄버거를 항상 넣고 다니며 씹었었지. 그래도 난 신사니 식사시간만은 엄수했거든. 1분이라도 지나치는 건 허락치 않았지만.
정확한 1시에 배가 고파지는 내가 꽤 12시부터 허기가 지기 시작했는가? 그리고 결국 12시10분에 가선 식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됐는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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