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사회풍조의 광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74년은 국내외적으로 『준열한 시련의 해』가 될 것 같다. 시민들의 마음 가운데 누적된 짙은 불신 풍조가 학생들의 교사에 대한 불신으로 번졌고, 급기야는 언론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나타났다. 이 불신풍조의 집약적인 표현이 작년의 일련의 사태 발전이었다 할 수 있다.

<불신풍조의 불식>
삼강오륜의 유교도덕 속에서 수 백년을 살아 온 이 민족에게 해방 후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의 서구풍조가 물밀 듯 몰려와 기존 도덕과 질서를 덮어놓고 낡은 것으로 몰아붙이고 개인의 치부와 공명만이 유일한 가치처럼 내세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치관의 동요 과정에서 세대간의 불신이 커나갔고 사회계층간의 단절이 초래됐던 것이다.
서구에 있어서는 『「프로테스탄트」의 논리』가 건재하였고 기각교적인 사랑의 도덕이 저변에 있었기에 이기주의도 사회정의 위에 정초할 수 있었으나 한국에 있어서는 유교적인 입신 양명론과 족벌상의가 결부되어 이기주의는 약육강식 적인 상업적 사회를 현출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명분도 아랑곳없는 실리위주의 사회풍토는 이웃의 괴로움이나 굶주림 같은 것을 생각할 사이도 없이 자신과 자기 가족과 자기 일가 일문의 번영과 명예 또는 재화를 긁을대로 긁어모으는 부조리의 풍토를 조성하고야 말았다. 일부 악덕 기업주는 자손대에나 갚을 차관을 들여와 공장을 짓고는 기업을 망하게 하여 대불케 하는 대신, 자기 자손들의 안락만을 위하여 재산을 도피시키는 풍조까지 성행하였고, 일부 권력층은 모든 교육기관의 평준화를 구호로 내세우는 그늘 아래서 자기 자녀들만은 외국의 귀족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켜 병역도 기피시킨 채 그들만의 안위만을 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 못한 사람들도 이웃의 괴로움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귀금속과 외화를 매점하고 생필품을 사재기하여 경제질서를 교란시키는 일을 예사처럼 범하고 있다.
74년은 이러한 불신풍조와 부조리 현상을 근본 수원하고 민족의 동질성과 동포애를 회복하는 해가 되어야 하겠다.

<동질의식의 회복>
시민과 정부간에 상호 불신이 일어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대화의 부족과 동질간의 단절이라고 하겠다. 정부는 불신풍조를 해소하기 위하여 허심탄회하게 민중의 소리를 경청하여야 할 것이오, 가식과 고답적인 태도를 떠난 동등한 입장에서의 대화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시급한 것은 참다운 언론 창달을 통해 항간에 유포되고 있는 유언비어를 근절하여야만 할 것인바, 언론이 참으로 책임 있는 자유의 기능을 회복했을 때 비로소 불신풍조는 일소될 수 있을 것이다.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것은 주로 언론기관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언론이 사회의 공기로서 국민들에게 알릴 것을 알리고, 민중의 소리를 그대로 대변할 수 있었더라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보는 바와 같은 혼돈은 그 양상이 달랐을 것이다.

<언론 자유의 창달>
정부는 지난 연말, 여러 번에 걸쳐 언론자율을 보장한다고 다짐하였는데 언론 역시 진정 자율적으로 국익과 안보문제를 신중히 생각하고, 민족의 장래 문제를 향도함으로써 불신풍조의 제거에 앞장서야만 할 것이다.
또, 사회 각 지도층간의 보이지 않는 균열을 봉합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하여서는 부정부패의 과감한 추방과 함께 사회적 불평등을 시정하는 평형조치가 단행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실질적인 불평등보다는 각 개인이 느끼는 불평등 감정이 보다 중요한 것이다. 국민간에 행여 있을지 모를 의식의 단층을 메우기 위하여 정치는 불평등감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국민들의 동질적 일체감을 소생시키기 위해 과감한 시책을 펴야 할 것이다.

<대문을 활짝 열고>
소비가 미덕이라는 착각 하에 날로 늘어나고 있는 소비성향을 낮추고 10년 전 20년 전의 우리 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서로 절약하고 아껴 저축하여 국력의 증강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호롱불조차 변변히 켜지 못하고 있는 지금 사람들이며 체불임금 속에 시달리고 있는 영세민에게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뻗쳐야 하겠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돕는 것이 곧 나와 나의 자손을 돕는 것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사회가 불안해지면 나의 재산, 나의 가족의 영광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74년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해일뿐만 아니라 사회 불안이 깃들일 가능성이 많은 해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살 수 있는 사회,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모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결단의 해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국민의 정부에 대한 불신은 무사안일에 젖어있는 일부 공무원 때문이기도 하다. 정부도 시인했다시피 그동안 공무원들은 유신을 빙자하여 국민에게 군림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74년에는 특히 공무원의 관료주의적 사고를 불식하고 신뢰와 봉사의 풍토를 이룩해야만 할 것이다. 정부가 솔선 불합리와 부조리를 삼가해 나갈 때 국민은 비로소 정부를 따르고, 사회는 명랑한 상호 신뢰를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누적된 불합리와 부조리를 근원적으로 추방하는 일은 우리 사회 모두가 당면한 가장 급한 74년의 과제라 하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