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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렴 공무원의 뒷바라지 한평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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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마음을 잘못 먹으면 호랑이가 물어가!』- 호랑이가 많았다는, 함경도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호랑이를 무서워했다는 이성녀 「파마」할머니(서울 종로구 수상동148의8)가 호랑이해를 맞아 1백살이 됐다. 대원군이 인현궁에 환궁하던 고종12년에 태어나 한말엔 포졸의 아내로, 일제 땐 농사지도 원의 어머니로, 지금은 각급 공무원의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로 깨끗하고 그래서 가난할 수밖에 없는 미관 이도의 뒤를 보살펴 오며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
이 할머니는 1875년5월18일생. 함경도 경성부에서 당시 관찰사 남 대감의 시의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은 원래 청운에 뜻을 둬 사촌들과 서울로 진사시험을 보러갔으나 홀로 낙방, 그 길로 무산명의에 사사해서 28세 때 명의의 이름을 얻고 도백주치의로 들어앉은 분. 부친은 그때부터 개업을 팽개치고 동현 안 예천당에서 아예 기거를 하며 칠순 남 대감만을 모셨다. 지금 같으면 「한자리」가 문제 안될 측근 중의 측근 신분.
그러나 부친은 못 이룬 청운의 미련을 깨끗이 잊은 듯 한창나이에 청 한번 안 넣고 꼿꼿이 본업에만 살고 갔다. 33세의 요절.
이 할머니의 나이 열둘이었다.
부친의 사후 가세는 날로 기울어져 끝내는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
할머니는 바보 같은 아버지를 결코 원망 않고 l8세때 가난하지만 마음이 착한 이웃마을 신 가게의 2년 연하 신랑(김인경씨)에게 시집을 갔다. 당시로는 남부끄러운 만혼이었다.
그러나 2년뒤 이 할머니 내외에겐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남편 김씨가 남 대감의 수행원 겸 포졸로 부름을 받은 것. 벼슬하나 조를 줄 몰랐던 죽은 시의 집안에 대한 보답이자 신임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 장인에 그 사위-. 서슬 시퍼런 대감을 모시는 자리이면서도 대감이 내리는 물건(모시·명주·쌀 등)외에 선물 한가지 들고 오는 법이 없었으며 청을 넣으러 오는 사람하나 없는 나날이었다.
『영감이 워낙 맡은바 소임밖에 모르는 위인이기도 했지만 도대체 그때는 지금처럼 줄을 찾아다니고 안 그랬다』는 할머니의 푸념 섞인 회고였다.
그러긴 8년, 집 꼴은 콩죽이 고작이었다. 할머니가 28세,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아기(아들 김태원씨·61년 작고)를 낳았을 때도 뒤주는 역시 빈통. 『너무나 속이 허해 뒷간에 가서 언 무김치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한입 곽 물으니까 이가 쑥 빠지지 아니겠소-.
남편은 이태 뒤 회령으로 넉 달간 대감을 수행 나갔나가 염병(장티푸스)에 결려 28세로 사별. 남긴 것은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똑같은 꼬래비 포졸의 군복과 8간 짜리 초가뿐,
벼슬한다고 호강한번 못해본 l0년 세월이지만 이 할머니는 지금도 한 가닥 원망이나 후회의 빛도 없다.
『우리 영감은 일전 하잎(한닢) 공돈 아이(아니)먹고 갔소』-.『나쁜 마음먹으면 호랑이가 물어가지』-또 호랑이가 무섭단다.
그때 영감과 함께 남 대감을 모셨던 한 벼슬아치는 남편벼슬 청을 넣는 아낙네를 탐했다가 대감에게 들켜 남대천변(경성읍내) 장대마을 신 깃대 위에 목매달려 죽음을 당하기도 했지만 영감은 위 눈도, 곁눈도 팔지 않고 꼿꼿이 살아갔다는 기억이다.
이후 청상과부가 된 이 할머니는 여자 단신으로 술을 빚어내고, 하숙을 치고, 해삼위로 소금장사를 다니며 억척스레 외아들을 경성농고(고보)를 마치게 한 뒤 경성군청 농업기수 (기자)로 취직시켜 가난하나마 청렴했던 영감의 뒤를 잇게 했다.
지금 할머니 슬하엔 손자·손녀·증손자·고손자 등 4대 20명. 손자 승명씨(53)는 법제처법령보급담당관(서기관)으로 재직중이고 그 맏딸은 KIST연구관에게 출가. 네 손녀는 장사하는 끝 손녀만 빼놓고 모두 전직·현직교사로 역시 교원들에게 시집가는 등 착실한 공무원집안.
할머니는 71세 때 월남, 그 동안 셋방에 앉혀 전전하다 지난해 비로소 손자가 마련한 7평 반 짜리(건평) 꼭대기 내 집에 산다. 하지만「썩은 나무에 가지가 돋는 법, 남의 것, 남의 자리를 탐하지 않고 나라 위해 썩는 나무가 되어 가는 자손들을 대견해하며 후회 없이 영감 곁에 갈 날만 기다린다. <김형구 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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