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후회 없이 살아왔다|한 세기를 살아 온 「백년 장수」들의 인생 체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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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 세기에 걸쳐 살았다. 끈질긴 삶에의 의지로 1백 년을 누린 수는 변화 무상했던 만상을 목도해 왔다. 자랑할 것도 없고 이름 나지도 않은 평범한 한 평생. 그러나 긴 1백년을 청순한 몸가짐과 깨끗한 양심을 지키며 남의 것, 남의 영광을 탐하지 않고 담담히 살아 왔다. 한 세기를 시간으로 치면 87만6천 시간, 솔씨가 자라 거목이 되고, 돌이 부스러져 모래로 날려진 세월. 그 세월에 인간사의 온갖 영고성쇠를 눈으로 보아 오며 스스럼없이 살아온 백수 노인을 찾아 그들의 긴 생애를 통해 겪은 생활관을 거울삼아 비춰본다.
새해에 꼭 1백살이 됐다. 정영근 할아버지(서울 서대문구 홍제동28의6)는 1874년8월14일생. 백년을 되새겨 보는 그의 얼굴에는 거목의 연륜처럼 주름살이 줄쳐 있지만 아직도 노안에는 부끄럼 없이 살아온 듯 생에의 만족감이 가득해 보였다.
정씨가 고향인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대화리를 떠나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온 것은 1897년8월5일. 지금으로부터 77년 전.
고종이 대한 제국을 선포하고 밖으로는 열강의 침략이 끊이지 않는 등 그때도 세태는 어수선했다.
빈농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정씨는 그해 여름 수해로 얼마 안 되는 농토마저 잃고 홀로 고향을 등져야했었다.
23세의 더벅머리 총각은 노자 한 푼 없이, 장안을 헤매다 이화 학당의 창설자인 미국인 선교사 「마리·F·스크랜튼」부인을 찾아갔다.
베 잠방이 차림의 시골 총각은 생전 처음 보는 파란 눈의 여 선교사 앞에 꾸벅 큰절을 했다.
『어디서 왔읍네까.』 부인은 서투른 한국말로 친절히 물었다. 『시골서 살길이 없어 부인께서 사람구제 많이 하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 왔습니다』『호호, 내가 무슨 구제를 했다고….』 「스크랜튼」부인은 한바탕 깔깔 웃고는 순진해 보이는 정씨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술 먹습네까.』『안 먹습니다.』『정말 술·담배 안 먹습네까」-그러면서 부인은 정씨의 주머니에 담뱃가루가 있는가 뒤져보고 입 언저리의 냄새까지 맡아보았다.
거짓말 안 하는 정씨의 결백한 성품이 「스크랜튼」부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때부터 정씨는 「스크랜튼」부인을 도우면서 양심을 지키며 성실히 일해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됐다.
그녀는 정씨의 말이라면 그대로 믿고 재단의 경리 일까지 맡길 만큼 신임했다.
『그때야 부정한 마음만 먹었으면 큰 힘 안 들이고 한 밑천 톡톡히 잡을 수 있었지요. 주위에서는 여 선교사 밑에서 일만하고 속셈 차릴 줄 모르는 나를 보고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게 어디 바보입니까. 그것이 양심이라는 게지요. 정씨는 비록 가난하지만 그때 양심을 지켜 인생에 오점을 남기지 않은 것이 지금도 백 번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람의 욕망과 부귀영화가 모두 허망하다는 것은 오래 살아보면 갈수록 새삼스럽게 느껴지지요. 재물도 권력도 끝내는 부질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만큼 백살을 산다는 것이 보장만 된다면 그렇게 탐욕스러워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탐욕생활이라는 게 그리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글방에서 천자를 조금 배우다 말았다는 정씨는 못 배웠어도 참되게 살아가는 길을 체험 속에서 터득, 욕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기미년 3·1운동 때는 만세 운동에 앞장섰다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때는 나 죽으면 또 남은 동포들이 독립 운동에 끝까지 나설 것이라는 신념이 있어 생명을 내걸고 항거했지요.』라면서 아직도 정강이에 남아 있는 당시의 고문당한 흔적을 내 보였다. 정씨는 요즘 젊은이들은 그때에 비하면 크게 나약해진 것 같다며 못마땅해했다. 불의로 남의 나라를 빼앗아 주름잡을 듯이 활개치던 일본이 끝내는 망해 가는 꼴도 눈앞에 본 그였다. 「스크랜튼」부인의 소개로 3년 후에 다시 정동의 미국 영사간에 자리를 옮겨 기수로 일해오던 정씨는 2차 대전이 일어나 영사관이 문을 닫게 되자 47년 동안 일해 오던 미국인 기관을 떠나 지금의 홍제동 고개 옆 산마루에 자리를 잡았다.
정씨는 그동안 술 한잔 마시지 않고 청빈하게 살면서 푼푼이 저축했던 1백10원으로 그 때만 해도 복숭아나무가 빽빽히 들어선 숲이었던 이 자리에 28평짜리 기와집을 지었다. 70세에 처음 갖는 「마이·홈」. 18세 때 「스크랜튼」부인의 소개로 23세의 정씨와 결혼했던 부인 김흥숙씨도 집을 가졌을 때는 65세의 할머니였지만 착한 남편과 가난하게 사는 것을 한번도 탓하지 않았다. 부인 김씨는 73세 때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정씨는 구차한 이웃돕기에도 항상 앞장섰다. 김장 못 담근 이웃집에 자기 집 김장 항아리를 통째로 들어다 주기도 했다. 지나는 거지를 보면 꼭 불러들여 동전 한 닢이라도 쥐어 주었다.
이 같은 정씨의 고운 마음씨가 알려져 지난 69년4월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참된 생활로 오래 살며 보람있게 살아오는 정씨를 표창했다.
정씨는 장남 상록씨(58·연세대학교 대학원 강사)와 며느리 유호숙씨(이비인후과 전문의)내외,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낳은 1남6녀 등 한 가족 9명과 함께 아직도 정정하게 단란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정씨는 『술·담배 안 하고 분수를 지켜 범람한 짓 아니한 게 오래 사는 길』이라면서 장수의 비결이 따로 없다고 말했다.
정씨의 맏아들 상록씨는 아버지가 언제나 『논·밭이 잡초 때문에 망하듯 사람은 탐욕 때문에 망한다』면서 『부모는 자식이 양심을 갖도록 길러야 한다』고 타일러서 이 말이 가훈처럼 됐다고 했다. 『1백년을 살았어도 자랑할만한 업적도, 물려줄 재산도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부끄럼 없이 살아왔지요. 다시 태어나도 이 삶을 택하겠습니다』-. 정씨는 화사한 새해의 아침 햇살을 받으며 노안에 티없는 웃음을 가득히 꽃 피웠다. <김창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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