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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7)<제자 정구영>|<제34화>조선변호사회(12)-경성의 사재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종형인 정구창은 어려서부터 교우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단재 신채호와 매당 변영만(해방 후 산강이라 개호), 이기찬 등과 축일 상종하여 청국의 강유위·양계초·이홍장 등과 일본의 이등박문·산현유명·대한중신 등이 매일 매일의 화제가 되다시피 했는데, 특히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이 담론의 중심이 되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 네 사람을 경성의 사재사라고 불렀었다.
정구창은 1907년 대한제국 법무부에서 시행한 제2회 변호사 시험에 응시하여 단 혼자서 합격하였는데 합격발표직 후 그 시험의 위원장이며 당시 법부의 고용차관으로 있던 창부용 삼낭(뒷날 일본의 추밀원의장)이 그 답안의 필적과 법 이론 전개에 경탄하여 즉시 법부로 정구창을 불러 접견했다는 것이다.
약관거세(실제로는 18세)의 청년의 풍채에 경탄한 창부용삼낭이 변호사를 하지 말고 결원이 있는 함흥지방법원 판사로 가라고 권고했으나 정구창은 지방이라하여 불응했었다. 그가 지방의 판사직을 거절한 것은 당시 부친이 김해군수로 재직하고 있었기에 경성집을 비울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창부용삼낭은 그를 경성지방재판소 판사로 일하도록 다시 권고하여 이내 경성의 판사로 임관되었다.
정구창의 판사재직 시 교우로는 후에 임정요인이 된 이동휘 노백린 등으로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그는 1913년 변호사 개업 후 21년 사망할 때까지 8년 가까이 변호사로서 크게 이름을 떨쳤었는데, 특히 30세 안팎의 청년으로서 당시 자기보다 30여년 연장인 한호농공은행장(후에 식산은행은행장)·백완혁(전 국회의원 백상규의 부친)과 상공회의소 부회두 주성근·한성은행 두취 한상룡 등과 접촉이 잦았었다.
또 한편으로는 육당 최남선과 하몽 이상협 등과도 자주 만나 우정을 두터이 하던 일이 5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눈에 선하다.
그는 1913년 변호사로 개업하자 곧 변호사회의 상임위원으로 당선되어 주로 선배인 박승빈 변호사와 평양에서 개업 중이었으나 경성재판소의 사건을 맡아 자주 상경하던 이기찬 변호사와도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특히 말하고 싶은 것은 앞서 이야기한바 있는 조선변호사협회 설립에 관한 경위이다.
조선변호사협회는 그 설립이 범 태평양국제변호사회의 참가를 표방한 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명목이고 기실은 또 다른 중요한 의도가 내포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조선 안의 민심은 의연히 술렁거리고 들떠있어서 어딘가 안정을 잃고 있었고, 국제적으로도 「벨사유」강화조약에의 조선독립 탄원사건과 뒤에 언급하고자하는 33인사건의 공소부 수리사건이 각국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조선에 대한 국내의의 인식을 새롭게 하고있는 때였다.
더욱 상해 임정요인인 몽양 여운형이 동경한복판에서 일본정부의 각로인 육상 전중의일과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을 교환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몽양은 갖가지로 자기를 회유하려는 일본정부의 모든 조건을 거부하고 통역을 맡았던 설산 장덕수와 함께 조선을 경유하여 공공연하게 상해로 돌아간 일대 정치공작사건이 있던 직후였다.
그러기에 조선인 변호사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동경의 국제변호사회의를 이용하여 조선민족의 독립에 관한 욕구는 의연히 내연되어 끊기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남기게 한다는 목적을 품고 있었다.
그런 관계로 동경대회에 간장도 박승빈 이종하 정구창 이기찬 등 5명의 변호사들은 그 회의에 참석하던 차에 비율빈 변호사협회의 참석자 5명을 초청하여 교려한다는 계획을 세워서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일비곡공원 송본정에서의 회합이 있었던 것이다.
그 5명의 변호사들은 동경에서 육상 전중의일과 만난 자리에서 조선자치론을 주장한 일이 있다고 해서 당시 독립운동에 열중하던 인사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바도 있으나 내가 듣기로는 그것은 조선에 자치를 달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차별한다고 하는 점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 와전되어 그렇게 된 것으로 안다. <계속> 【정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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