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이후에 집단지도체제로|십전대회 그후 지도층 위계변화 내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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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십전대회 이후 중공지도층 내부의 위계가 크게 번했다.
물론 당대회를 계기로 서열이 변한 것은 그전에도 여러번 있었던 일로써, 예컨대 유소기가 실덕으로부터 제2인자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45년 칠전대회를 경계로 해서였다.
그러나 이번의 위계변화는 그 규모가 전례 없이 클 뿐만 아니라 「모택동 이후의 중공지도체계」일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6일로써 모의 연령도 만80세-. 중국식으로 따져서 「80노인 행세를 한다」는 「팔감」의 나이가 된 셈이니까 현재의 서열이야말로 「후계자포석」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 80세로 후계자 포석>
지난 10월2일자 인민일보는 하루 전에 있었던 정부수립기념행사에 참석했던 지도자들의 명단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발표했다.
위심무·주덕·주은내·왕홍문·섭검영·이덕생·장춘교·화국봉·기등규·오덕·왕동흥·이선념·요문원·소진화·「사이후딘」·이부춘·등소평·서향전(이상18명) 여기에 소개한 서열은 십기대회 이후 아주 철저하게 지켜져 왔으며 소위「십·일절」행사를 계기로 그 전모가 노출된 셈이었다.
어쨌든 이와 같은 「십전대회 이후의 서열」과「십전대회 이전의 서열」을 비교하면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발견된다.
첫째, 종전에는 주은내·섭검영의 바로 다음자리를 차지하던 모의 부인 강청이 완전히 묵살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앞에 소개한 명단은 「십·일절」기념행사에 참석한 지도인사들을 소개한 것이다.
한데 강청은 바로 그날 주은내·왕홍문·섭검영·등소평·서향전과 함께 중산공원에서 거행된 기념식에 참석했었다.

<강청 사진에 설명 없어>
천층공원·노동인민문화궁·석화원·자죽원 등에서 열렸던 각종기념행사의 참석자들 가운데 인민일보에 의해 이처럼 묵살된 인사는 오로지 강청 한 사람뿐이었다.
강촌은 보도기사에서 묵살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진보도에서는 거의 모욕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
즉 인민일보는 중산공원기념식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강의 모습이 분명히 나와 있는데도 사진설명에서 이름을 빼어버린 것이다.
좀더 상세히 설명하면 이 사진에는 주은내를 중심으로 오른편에 왕홍문·강청, 왼편에 섭검영·등소평·서향전이 차례대로 앉아 있었다.
따라서 좌석의 순서로 치면 강은 주·토·섭 다음의 대우를 받은 폭인데 어찌된 셈인지 사진설명에는 등소평·서향전의 이름까지 나오면서도 강의 이름은 빠져버렸다.
둘째, 왕홍문·이덕생·화국봉·오덕의 눈부신 진출이다.

<오덕도 이선념 앞질러>
이 가운데 왕·이는 당중앙부 주석이므로 이미 예상되었던 바이지만 화·오의 두사람이 왕동흥이나 이선념 부수상을 앞지른 것은 예상 이상의 진출이었다. 참고삼아 10월 한달 동안 인민일보에 보도된 공식석상의 출석 횟수를 보면 화4회·오5회·왕4회·섭4회·이덕생5회인데 반해 강청·장춘교·요문원은 2회에 불과하다.
그런데 문혁출세아들 가운데 십기대회에서 다시 한번 도약한 이들과 크게 전락한 요문원을 비교하면 재미있는 차이점이 발견된다.
즉 화국봉·오덕은 당에서, 이덕생은 군에서 이미 문혁 이전에 상당한 경력을 쌓았었으며 강청의 직계사단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왕공문은 당경력이나 군경력은 없었지만 그역시 강이 지휘하는 문혁소조의 「멤버」는 아니었다. 특히 북경으로 올라온 다음부터는 주로 주은내의 지도를 받았으므로 십전대회 직전까지도 「당요인」아닌 「정부요인」으로 분류될 정도였다.
반면 조락한 요문원의 경우는 모두가 정반대이다. 당에서의 실무경력은 전무인데다가 강청계 문혁소조의 핵심「멤버」였던 것이다.

<장춘교는 저력 보이고>
세째, 요문원의 급격한 퇴세에도 불구하고 요와 거의 같은 입장일 것으로 판단되던 장춘교는 그런대로 저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위에서 사용한 두개의 기준, 즉 강청과의 거리 및 문혁 이전의 경력으로 판단한다면 그다지 이상스러울게 없다.
장은 일개 문예평론가였던 요와는 달리 해방일보부사장·상해시당위선전부장 등을 역임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상의 3가지 특징을 염두에 두고 「십전대회 이후의 위계」를 종합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우선 모택동의 사후에는 주은내를 정점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가 실현될 것이라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최근 공자비판이 고조되는 점을 들어 주은내 실각설을 논하거나 강청계의 문혁소조파가 퇴락한다는 점을 들어 주·강 권력투쟁설을 퍼뜨리지만 이것은 지나친 추측인 것 같다.
공자비판은 64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던 「사학의 재정립문제」이고 강청은 애초부터 주의 적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혁소조파가 조락한다고 해서 문화대혁명의 노선 내지 정신이 무시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필무·주덕 너무 늙어>
앞에 소개한 18명의 인사 가운데 단·주·주·섭·이선념·진운·이부춘·등소평·서향전동 꼭 절반이 비문화계의 소위 혁명원로이기는 하지만 이선념을 빼면 모두가 일할 나이는 지난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모택동 사후의 지도층은 문혁출세아 일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모택동은 고대성현을 본받아 유소기와 임표에게 두번이나 선양을 허락했다가 번번이 철회한 끝에 그 방식을 「집단」으로 바꾼 것 같다.
요임금이 30세의 순을 등용해서 30년을 써본 후에야 선양했던 고사에 비춰보면 모가 불과 7∼8년밖에 겪어보지 못한 문혁출세아들에게 선결하면서「집단」이라는 보험을 든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홍은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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