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서독이 인권유린 감시하자 동독 주민 탄압 줄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독일 통일 과정에도 인권정책이 있었다. 통일 전 동독의 인권유린에 대한 인권을 중심축에 놓고 압력과 지원을 병행한 서독의 일관성 있는 개입정책을 말한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의 마이클 커비 위원장은 이런 인권정책이 “베를린 장벽을 허문 원동력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서독의 동독 정책도 처음에는 대결적이었다. 1949년 정부 수립 후 서독은 동독의 붕괴를 앞당기기 위해 선전전 일변도의 정책을 펴왔다. 반공단체를 중심으로 동독에 선전물을 살포했고 정당의 동독사무소 등이 동독의 인권 문제를 비판했다. 동독의 반발로 무력충돌도 생겼다. 이런 서독의 정책은 동독이 1961년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는 명분이 됐다.

 베를린 장벽 건설 후 서독은 대결정책의 한계를 깨달았다. ‘장벽은 제거되어야 한다(Die Mauer muss weg)’는 시민의 요구 아래 서독은 동독을 거대한 감옥으로 보고 인권 유린을 끝내기 위한 쪽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이때부터 ‘동독의 독재와 인권유린은 비판하되 인도적 사업으로 인권 개선에 집중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에서 이산가족 상봉, 사람과 정보의 교류, 동베를린 단기체류 허가 등 인적 접촉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동독 인권침해를 모니터링하기 위한 중앙기록보존소를 설립하는 등 압박도 병행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심윤조 의원은 “동독의 인권 유린 상황에 대한 기록을 보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독의 인권 탄압 사례가 감소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그런 자료들을 나중에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69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정권과 대화를 시작하며 만들어진 ‘동방정책’은 독일 통일의 기반이 됐다. 브란트 총리는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기치 아래 ‘작은 보폭의 정치(Politik der kleinen Schritte)’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추상적 통일 논의 대신 구체적 인권 문제에 집중했다. 통행협정과 우편협정을 체결하고 동·서독 교류를 이어갔다. 한편으로 서독은 “체제 전복 대신 인권 문제가 중요하다”면서 72년 동·서독 기본조약에 유엔헌장을 빌려 ‘인권보호’를 명문화하게 했다.

 브란트 총리의 뒤를 이은 헬무트 슈미트 총리는 그의 정책을 계승해 소련의 브레즈네프 및 동독의 호네커와 정중한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동독 인권 문제의 국제화에 노력했다. 슈미트는 75년 체결된 헬싱키 협약에서 이동의 자유, 동서 간 커뮤니케이션 자유, 인권 보장을 주장했다. 소련도 이 문서에 서명하며 80년대까지 유럽 냉전이 종식되고 동독과 동유럽 국가의 인권운동 그룹의 활동이 보장됐다. 슈미트는 “헬싱키 회의가 동서 데탕트의 정점이었다”고 회고했다.

 인권 논의로 시작된 교류는 기초인프라 투자와 경제적 지원으로 이어졌다. 78년 동베를린~잠브르크 고속도로 건설사업이 대표적이다. 82년 기민·기사당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서독의 통일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헬무트 콜 정권은 정치범거래를 확대하고 대규모의 경제차관을 제공하면서 실용적 인권정책을 이어갔다.

 83년과 84년 2회에 걸쳐 19억5000만 마르크를 지급보증하며 외환지불유예 상태이던 동독을 구출하기도 했다. 경제협력 제공의 대가로 총격사살 행위 금지, 동독 자유여행, 서독 방송 청취 허용 등을 얻어내며 조금씩 동독의 기초인권을 개선시켰다. 개신교단체와 환경단체 등은 동독의 인권 개선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고 89년 독일은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통일에 도달했다. 인권을 기반으로 인적 접촉→교류와 인도적 지원 확대→기초인프라투자 등 경제지원→독일 통일의 경로였다.

 이런 서독의 접근법은 한반도에도 유효하다는 평가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정책의 경우도 북한 인권문제 개선과 압박 노력을 최우선으로 고민하면서 문화적·경제적·정치적 통일로 외연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원엽 기자

◆동방정책(ostpolitik)=서독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추진한 동구권과의 관계정상화 정책.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급진적 통일정책을 대신해 동독을 독일 내 제2의 국가로 인정하고 동등한 자격 위에서 협력을 만들어 나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