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광주 선생을 애도함|김영주<서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김광주 선생의 갑작스런 부음을 듣고 며칠 전 문병했을 때 선생이 보인 강인한 삶에의 의지가 그처럼 허무하게 무너진 데 대해 비통함을 금할 수 없었다.
생전에 보였던 그 의지처럼 선생의 평생은 강직한 것으로 일관돼 왔다.
일제시대를 중국상해에서 보낸 선생은 해방직후 귀국하여 중국문학의 국내소개에 앞장서는 한편 창작에도 정열을 기울였다. 여자처럼 섬세하면서도 차가운 성격 때문에 가까이 사귄 친구는 별로 많지 않았으나 간혹 친지들과 술자리를 같이하게 되면 사회의 부조리나 물의에 대해 참지 못하는 그의 불같은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곤 했다.
그러나 선생은 정이 많은 일면도 가지고 있어 자신은 빈한하게 살면서도 주위의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 동네 이웃 가난한 소녀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자신의 일은 덮어두고 며칠씩 동분서주했던 일 따위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선생이 병마의 시달림을 받기 시작한 후 작년 여름엔가 주위로부터 향리에서의 정양을 권고 받았으나 선생은『산천초목이 다 푸르러도 푸르러 보이지 않으니…』하고 한숨짓던 일이 생각난다.
그후 선생은 끈질긴 투병을 계속하면서 3,4년만이라도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누누이 이야기해 왔다.
선생의 여한은, 작가로서 순수한 창작물을 마음데로 써 보지 못했다는데 있는 것 같다. 와병하기 전까지 수삼년 동안 무협소설을 발표하면서도 선생은 창작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고 와병 후에도『글을 써야 할텐데…』를 입버릇처럼 뇌시던 선생이 이처럼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시니 그저 모든 것이 허무 할 따름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