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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5)<제자 전택부><제33화> 종로 YMCA의 항일 운동 (35)|전택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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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친한파 일인들>
지금까지 일제 36년 동안 YMCA가 어떻게 항일 투쟁을 해왔는가를 여러「에피소드」중심으로 살펴봤다. 그런데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여 짓밟고 있는 동안에도 대의에 서서 한국을 이해하고 YMCA를 도와준 일본인도 있었다는 점을 잊어버릴 수 없다.
첫째로 「다까끼」란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미국 「홉킨즈」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은 지식인이다.
귀국하여 동경 YMCA 이사가 되고, 직업은 제일은행의 사원이었다. 한국에는 1903년 경성 지점장으로 부임해왔다. 마침 그때 「헐버트」·「알렌」 등 미국인과 「브라운」 등 영국인이 YMCA 자문 위원회를 조직할 때 이에 가담하여 한국 Y창설에 조력했다.
한국 YMCA가 1903년10월28일 창설되자 초대 12명 이사 중의 한사람으로 뽑혔다. 마침 그때 일로 전쟁으로 인하여 부상병이 수없이 운반되는 참상을 보고 따뜻한 구호의 손을 펐다. 더군다나 그때 벌써 노골화된 일본의 식민 정책을 비판하다가 1904년 소환되고 말았다.
그 다음 사람은 「가와까미」란 일인 의사이다. 그는 1923년9월 동경대 화재 때 수난을 당한 한국 유학생들을 구호했다. 그 잔인한 일인들이 무죄한 우리 유학생들과 거류민들을 수없이 학살하는 참상을 보고 구호의 손길을 폈던 것이다. 그는 무교회주의를 영도하는 「우찌무라」의 동지인 동시에 재일본 한국 YMCA의 총무 김정식의 친구였다. 딴 얘기지만 김정식은 1906년부터 일본에 가서 재일 한국 Y를 창설하고 일찍이 무교회주의의 동조자가 되고 그것을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한 사람이다. 「가와까미」 박사는 부상당한 한국인들을 자기 병원으로 대려다가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그중 한 학생이 혼수 상태에서 깨고 보니 원수 일본인 병원에 들어 있지 않은가? 깜짝 놀라 그는 일인의 치료를 거절하였다. 그때 「가와까미」 박사는 잠깐만 참으라고 하면서 들어가더니 족자 한폭을 들고 나와서 이분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 족자는 월남 이상재의 친필로 된 「일심상조불언중」이라고 쓰인 족자였다. 그는 이 족자를 김정식을 통해 선물로 받았으며, 평소부터 이상재를 선생으로 존경해왔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이에 그 학생은 도리어 미안해서 계속 치료를 받고 완쾌하여 퇴원했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얘기다. 이 족자는 그후 오택관 목사에게 전승되어 지금은 그 아들 오재경 소장으로 한국에 와 있다.
또 한분은 「소오다」란 일인이다. 그는 젊었을 때 방랑기가 있어 대만에가 살았다. 하루는 술에 취해서 거리에 넘어져 죽게된 것을 어떤 한국인이 구호해 주었다고 해서 이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1905년 한국에 와서 YMCA 일본어 선생이 됐다. 그때부터 그는 월남 이상재를 존경하게 됐다. 무조건 그의 말이면 쩔쩔매는 하수인처럼 됐다. 그리고 한국인이 일본경찰에 잡혀갈 때마다 쫓아다니면서 이를 변호해 주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자기 동포에게도 「스파이」 혐의를 받고 한국인들에게도 의심을 받았다. 1913년부터 그는 「가마꾸라」 고아원을 창설하여 한국 고아의 아버지가 됐다. 그는 교회의 전도사 일을 보는 한편, 고아들과 같이 먹고 자고 마시며 살았다. 해방이 되자 그의 부인은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그만이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마음속에는 다시 한국에 돌아와 한국 고아들을 위하여 여생을 바치자는 것이 소원이었다.
드디어 그의 소원은 이루어져서 1961년5월6일 95세의 고령으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그때는 아직 한일 국교 정상화가 안된 때인 만큼 배일 「데모」가 자주 터지던 때였지만 그만은 친지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됐다. 그리고 돌아온지 1년도 못되는 1962년3월28일 후암동에 있는 영락 보육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 1주기를 당하여 YMCA는 추도식을 가졌다.
그때는 한·일 국교를 반대하는「데모」가 극성을 부리던 해이다. 하나 YMCA는 그처럼 착한 일인에 대해서는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추도식을 강행했다. 항일 단체가 친일 한다는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그때 「기시」전 수상이 그의 딸과 사위 (국회의원)와 언론인들을 보내어 조의를 표했다. 그는 「소오다」옹의 같은 고향 사람이며 그의 인류애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기시」가 친한파 정치인이 된 이면에는 이와 같은 미담이 있다.
이때부터 한국 Y와 일본 Y는 고교생 교환 「프로그램」을 갖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서로 보내고 받고 하면서 양 민족의 친교와 이해 증진을 도모했다.
더욱이 일본 Y는 일본 민족이 저지른 죄과를 속죄한다는 뜻에서 이를 환영했다.
그래서 1963년 가을 일본 Y 동맹 총무 「이께다」가 정식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영어만을 썼다. 우리도 역시 그때는 일본말 쓰는 것을 삼갈 때라 사석이나 공적에서 반드시 영어를 썼다. 하나 그것은 어색한 일이었다.
하루는 약 60명의 회원이 모여 그를 환영하는 모임을 가졌다. 모두가 호기심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회자는 그를 소개했다. 사회자는 「이께다」 총무에게 『여기서는 영어를 안 써도 무방하니 일본말로 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통역은 서울 중앙 Y총무 전 아무개가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60명 관중은 다 일본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들인 인데 내가 그 앞에서 통역을 한다는 것이 쑥스럽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일본말로 아주 조심스럽게 『본인은 아무런 준비 없이 여러분에게 인사말씀을 하게되니 무한한 영광』이라고 말을 시작했다. 나는 그 옆에 서 있다가 그 뜻을 거꾸로 해석해 가지고 『본인은 이런 기회가 있을 줄 알고 1개월 전부터 연습해왔다』고 통역을 했다. 그러자 관중은 폭소를 터뜨렸다. 통역 없이도 내 뜻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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