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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김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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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시가 음악의 상태를 더욱 동경하고 있는가, 아니면 회화의 상태를 더욱 동경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무어라고 단정 내릴 만한 자신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시는 음악이나 회화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시는 평범한 진술이지만 시인이 쓰기 때문에 시인의 세계인식의 태도가 시속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홍영식의『주말오후』(현대시학1)에는 소진되어 가는 것에 대한 시인의 아쉬움이, 그리고 회화를 지향하고 있는 김춘수의『채송화』(한국문학12), 박용래의『꽃물』(상동), 그리고 노향림의『지산리 마을』(현시1)등에도 시인들이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그들의 심적 공간이 암시되어 있다.
외적인 대상을 묘사함으로써 회화의 상태에 들어가려 하고 있는 세 시인의 경우는 각각 독특한 편차를 보여주고 있어 주목을 끈다. 그 세 시인은 다같이 대상의 묘사라는 측면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지만 김춘수는 시인자신의 감성을 은연중에 드러냄으로써 정경에 어떤 감정을 부여하고 있으며 박용래는 여러 대상을 또 하나의 색채감을 내기 위해 조립시키는 시작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며 노향림은 하나의 정경을 묘사하기 위해 대상을 뒤틀고 있다.
그래서 언어자체가 가장 학대받고 있는 것은 노향림의 경우이다.
그녀의 시속에서는 햇빛의 몸이 팅팅 불어 있으며 들판은 몸져누워 있다. 시인은 대상을 재치 있게 의인화하여 사물을 묘사한다.
그러나 읽는 이들에게 더욱 크게 작용하는 것은 정경이 아니라 재치이다.
김광균의 절필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시인이다. 박용래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를 표현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맡을 너무 깎고 다듬는다. 그에게 있어서의 말이란 끌이나 망치같은 도구가 아니라 집짓기 놀이에 쓰이는 작은 나무조각 같은 애완물이다. 그의 시는 그래서 사랑스럽지만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김춘수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인이다. 『채송화』에 있어서도, 마지막행 바로 앞의 <예쁜>이라는 형용사가 없었더라면, 나는 그의 시를 결코 즐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의 내적 공간을 완전히 외적공간으로 변모시키고서야 안심을 하는 시인인데,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의 경우에도 형용사 하나를 의식적으로 놓치지 앓음으로써 자연과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시인을 드러내고 만다. 김춘수의 시로는 근래에 보기 드문 완벽한시라고 생각한다. 무의미는 역사 의미와의 싸움 속에서 그 가치를 얻는다.
고은의『침묵에 대하여』(한국문학 12)와『초혼집』(문학과 지성14호)5편, 김형영의『침묵의 무늬』(샘터사간). 이시영(※69년 신춘「중앙문예」당선)의『눈이 내린다』(문학과 지성14호)5편을 재미있게 읽었다. 이시영은 전에 즐겨 사용하던 과장된 어휘들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궁핍한 시대와 그 시대 속에서 자동인형처럼 살아 나가는 익명인들의 세계에 대해 깊은 두려움을 표시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정립종·황동규의 어떤 시행들을 연상시키는 시행들 더러 눈에 띄어 감동을 약화시킨다. 시가 보편적이 된다는 것은 남들이 사용하는 말을 써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남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자신의 언어로써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걸 실감케 한다.
김형영의 시집은 한 젊은 시인이 서정주의 압력에서 어떻게 벗어나서 그이 삶의 집인 그의 언어를 발견하게 되었는가를 역력히 보여준다. 초기 서정주의 광기가 가난의 수락을 통해 영원의 세계로 변모한 것과 다르게 그의 초기의 관능적인 광기는 그의 눈을 멀게 하는 비정한 세계와 그 세계 속에서도 그의 삶을 삶답게 유지시킬 수 있는 어떤 정신적 지주와의 대립으로 발전해 나간다. 최근에 발표되어 주목을 끈『네 개의 부르짖음』같은 것은 그 좋은 예다.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겠다』(한국문학12)는 그러나 지나친 요설이다.
고은의 시는 2, 3년이래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다.
섬세하게 감정을 절제하고, 선적인 직관으로 대상의 본질을 꿰뚫던 시이어 이상하게 말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것도 대부분의 경우 절규이다. 그 절규는 조국의 산하에 대한 그의 급속하고도 격렬한 경사와 결부되어 있지만, 그 산하 역시 행복스럽고 편안한 자연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보기 흉한「잠든」자연이다. 그 자연으로 하여금 시인은 역시 그것과 마찬가지로 억눌려 있고 억압되어 있는 인간들의「노예적 애수」를 달래게 한다.
그 자신이 전면에 나와서 궁핍한 시대의 인간들을 직접 위로하고 격려하는 대신에 그는 오히려 더 침묵하기를, 더 고통하기를, 더 멸망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을 그는 침묵하는 것으로 침묵하는 것을, 잠자는 것으로 잠자는 것을 깨운다는 식의 조사법으로 달성한다.
김광림의『갈등』(심상간) 과 문병란의『정당성』(세운문화사간)을 읽었다.
김광림은 한 가난한 시인의 일상적인 무기력한 삶을, 문병란은 말할 것을 말하지 못하는 자의 아픔을 각각 노래하고 있다.
한마디 덧붙이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러나 시인이 노려야 하는 것은 무기력함이 아니라 무기력한 삶을 반성시키는 일이며 시인이 저항해야 하는 것은 옳다고 흔히 생각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회의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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