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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취 사동 수재 만나 역방을 탄원 놀라운 한문실력의 유학자로 인정 받아 시 도 짓고 교육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정희득이 볼모인 몸으로 그래도 어느 정도 자유로 왔던 것은 복취사의 수좌인동 악선사의 힘이 컸다.
5윌5일 (1598년) , 정희득은 유중원의 소개로 동악 선사를 만난다.
그렇지만 정희득이 기실 복취사를 찾은 것은 그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5월5일,4일,3월29일 등에도 복중사를 찾았다고 쓰고 있다.
어느 떼는 모라보측 그리고,어느 때는 포도덤불을 보려고,또 어느 때는 시를 짓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정희득이 복취사의 주직인 속악선사를 만난 것은「드꾸시마」땅에 발을 디딘 지 5개월이나 후였던 것이다.
정희득은 그의 글에서 동수좌라고 만 그를 지칭하고 있으며, 동수좌는 「마와」 (아마=덕도 일대의 옛 지명) 일대에서 이름 높은 중으로 호는 반자이고,성주인「하찌스까·이에마사」(봉수하 가정)가솔 진중에는 대리성주 역할을 맡을 만큼 실력과 여망이 높다고 설명했다.

<명성 높은 중…동악위사>
실제로 이 동수좌라는 동악 선사는 성주 「이에마사」 (가정) 와는 동모리부의 동기간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이에마사」 의 아버지 「하찌」 (봉수하 정승) 에게 쟤혼하게 되어 「마사가쓰」의 장남 뻘이 되었으나, 이복 형제인 「이에마사」 와는 의가 좋던 나머지 동악 선사는 성주 자리를 「이예마사」 에게 양보하기위해 출가, 중이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에마사」 는 선사를 깊이 신뢰하고 높이 존경하여 자신이 출진하고 없을 때는 선사로 하여금 성주대리로 번성을 보살피게 했었다.
그 당시 동악 선사는 나이 44세.
정희득은 처음부터 그에게 한문 단답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
간악선사는 젊은 나이에 놀라운 오문력, 그리고 꿋꿋한 선비 정희득의 유학자로서의 자질을 높이 사주어 한눈에 좋아졌던 것이 분명하다.
이날 이후 정희득의 복번사 방문은 더욱 빈번해졌다. 유중원과 또는 유여굉과 더불어,혹은 혼자서 복취사를 찾아가서 속악선사를 만나곤 했었다.
정희득은 동악 선사와의 필담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교환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자 일본인의 부당한 볼모 납치행위를 규탄하고 자신의 석방을 주장하기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차차 정희득의 학식과 성문삼 널리 알려져 2천 석 정도의 녹을 받는 소년 번사와도 친구가 되어 시를 지어 서로 응수하는 등 교유 하기를 서슴지 앓았다.
따라서 외출도 자유로 와져 현재「도꾸시마」공원으로 알려진 성산에도 놀러 올라가곤 했다.

<낡은 세명착판 만 우뚝>
간악선사가 주직으로 있던 복취사는 1586년,즉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6년 전에 성주「이에마사」 가 아버지의 명목을 빌기 위해 성산 동쪽 기슭에 세운 절이었다.
동악 선사는 의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 절의 주지가 되었고 마라서 복취사는 하찌스까」 가의 보제 사인 것이다. 이 것은 160l년 성산동쪽에서 「도꾸시마」시하 조임 정으로 옮겨 앉았고,l650년에는 대웅산 전원사라고 이름마저 바뀌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정희득이 찾았던 복취사는 성산에 있던 복취사 이며, 그 후신인 흥원사 와는 실제로 직접적인 인연은 없다. 그러나 초창당시 주지이며 정희득을 10개월 만에 고향으로 들려 보내준 간선사와 인연때문에 복취사를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도꾸시마」시내 하 조임정 한복판에서 몇 사람의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은 다음에야 고찰 흥원사를 겨우 찾아내었다.
그러나 찾은 옛 절은 절이 아니라 마을 한복만 길가였다.
멋대로 발달된 밀집도시가운데 뚜렷한 입구 조차 없이 동네 한길로 쓰이고 있었다.

<봉륵 26만 석을 자랑하던「하찌스까」가의 보제사가 이 모양이라니…>
세상 권세의 무상함이 새삼 가슴을 찌른다. 절 이라고 하기보다는 공동 묘지라고 부르는 게 옳을 것 만 같다.
삐죽 삐죽 고색창연한 비석들이 늘어서 있는 바로 옆까지 집들이 꽉 들어 자있다.
절의 담벽도 거의 없고 잡초는 비석들의 사이사이에 우거져있으며 마당으로는 자동차가 드나들며 아무렇게나 주차 까지 하고 있다.
한바퀴를 돈 다음에야 입구쪽을 찾아냈다. 낡은 간만에 글씨마저 다 헐어 빠진 실명만이 세워져 있다.
『… 「이에 마사」《가정) 공이 건립한 복번사를 이곳에 옮긴 것이다. 당시의 사역은 동쪽으로 5백 여보.폐번 후 축소 되고 사재로 전소,전후 건립되었다.2보가량의 보수하다 당소가 있으며 1대부터 14대까지의 번주가 묻혀있다. 』명치유신에 의한 폐번 후 이 절은 하고 많은 풍파를 겪었음에 틀림없다.분노한 민중손에 불사라 지고 경내의 토지는 작아 질대로 작아졌을 것이다.

<옛 자료 모두 불타버려>
그나마 전쟁 때 폭격을 맞아 완전히 타버렸다.재앙이 끊이지 않고 계속된 셈이다.·
현재의 주지는 바로 우리가 찾아갔을 무렵 자동차를 타고 나갔다고 부인이 설명했다.현재 이 흥원사의 주소는 「드꾸시마」시하 조임 정2의 방 임제 종묘 심사라고 쓰여있다.
주지 이 등웅방 씨의 부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년 부인은 『옛날부터 남아 있던 옛 자료 등이 폭격때 모두 불타 없어졌다』 고 서운해 했다.
1945년 때만 해도 고찰인 본당을 비롯 부속건물이 제법 있었다는 이야기다. 바로 건너편 성산기슭에 있던 NHK 방송국이 비행기의 폭격을 피해 이곳 안으로 소개해 와 있었다.
절 안에 「안테나」 를 달고 있었는데 이것을 보고 집중폭격을 하여 본당 건물은 물론 「하찌스까」 가의 묘소만을 남기고 깡그리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아직 절의 모습 못 갖춰 주지부인은 『절은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고 뒤집혔었다』 고 그 당시의 폭격양상을 물려 주었다.
종전이 되자 절을 재건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절 경내로 들어와 땅을 차지하고는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결국 앞 뒤뜰의 토지는 모두 살고 있는 사람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현재의 본 땅은 가 건물로 지금은 절의규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덧없는 종루가 높직이 세워져 있다.부인은 『한국에서 주지로 있다가 돌아온 먼젓번 주지님이 문이라도 있어야 겠다고 절문과 종루겸 세운 것이다』고 했다.
그 전주지는 4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 그 종루는 마치 우리나라 성의 대문식으로 가운데 「시멘트」로 올린 홍문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이러나 조잡하기 이를 데 없어 우리나라 식이라고 알아보기가 힘들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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