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제33화>종로YMCA의 항일운동(17)일|「질레트」의 추방|전택부(제자 전택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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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질레트」총무가 회의에 진상을 폭로한 비밀서한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이또」가 죽은 후… 군벌이 일본정계의 일부를 장악하고 한극은 완전히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종 집회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목적의 기부행위 또는 재정행위든 독재적인 명령과 지령으로 마음대로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세 사람이 모여도 경찰의 사전 허가가 있어야 가능했으며 모금도 허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경찰은 재판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외국인을 추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YMCA같은 단체와 다른 민간단체는 꼼작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법령과 지령은 실지로 강행되었습니다. 다만 기독교회와 YMCA와 같은 외국인들이 관재하고 있는 단체만은 눈감아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종도일 뿐, YMCA와 교회는 물샐 틈이 없는「스파이」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일본인「스파이」도 있있고, 그중 어리석은 한국인들은 매수 당하여 외국인 선교사들과 그 행동을 샅샅이 밀고하면 경찰로부터 상금을 타먹는 자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심복이어야 할 한국인 중에도 국고에서 기밀비 또는 봉급을 타먹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보통 아는 사람도 있고 우리의 정식직원도 있었습니다.
1년 이상이나 선교사 측과 경찰이 세밀히 조사한 결과 YMCA나 교회 안에는 정부당국에 대한 불법행위가 없었다는 것이 인증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스파이」와 일제의 앞잡이들은 우리를 상대로 사건을 조작하여 교회와 교회학교에서 1백20여명의 기독교인들을 검거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서울YMCA 부회장 윤치호씨와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도 여럿이 검거되었습니다. 법정에 제시된 경찰의 조서와 소위 피고인들의 자백서 내용에는 20명의 선교사들이 암살음모 사건에 관계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음모 내용인즉 총독을 암살하려고 공모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주장하기를 「모파트」(마포삼열) 박사는 권총이든 상자를 감추어 두었고「해리스」감독은 통역을 통해서 선동연설을 했고 「언더우드」(원두우) 박사는 자세한 거사과정을 전보로 지시했고, 그리하여 약20명의 선교사들이 다 전국적으로 이 거사를 지지하고 선동했다고 허위조서를 꾸몄던 것입니다. 경찰은 한국인들이, 특히 기독교인들이 35개 처에서 총독이 통과하는 것을 지키고 있다가 암살을 기도했다고 주장했습니다.…서울YMCA의 부회장에 관하여 나는 편지 한강을 썼습니다. 그 편지는 구라파와 미국인 지도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하여 쓴 것이었습니다.
그 편지는 공판이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에 쓸것은 물론이며, 총독부당국이 미국인들의 유괴사실을 공포하기 전에 썼습니다. 그 편지는 나의 개인편지에 불과했고, 비밀이 지켜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내용은 공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지각없는 친구에 의하여(물론 악의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공개되고 말았습니다. 그후 내 편지는 일본말로 번역되어 서울과 일본에 있는 정부관리들 손에 입수되었습니다. 결국 총독부는 사실상 피고인 대부분을 석방하기는 했지만, 이 때문에 나는 그들의 악감과 적대심을 사게 되었습니다.』
이 비밀서한은 1913년7월14일자로 그가 추방된 후 중국에서 발송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구라파와 미국인 지도자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하여 썼다』는 다른 편지는 19l2년2월5일 윤치호가 검거된 후 첫 공판이 시작된 6월28일전인 4월 또는 5월 사이에 쓴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홍콩」의「데일리·뉴스」에 보도되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이러한 해외의 비난때문에 이 조작사건에 관련된 신성학교·숭실학교·신안학교·한영서원등 학생YMCA가 조직되어있는 기독교계통 학교들은 다행히 폐교되지 않고, 선교사들도 구속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를 쓴 당사자인 「질레트」(길례태) 총무만은 온갖 고초를 겪고 결국 1913년5월13일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다른 선교사나 학교들은 무사했지만 유독「질레트」만은 깡패들의 공격과 갖은 위협을 다 받다가 결국 국외추방이란 희생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방향을 바꾸어서 총독부는 YMCA를 어떻게 탄압했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위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YMCA는 그 조직의 힘, 회관의 힘, 재경의 힘, 외국인의 힘 등으로 무시할 수 없어서 처음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다가 결국 YMCA부회장 윤치호와 각 학교의 학생YMCA간부들을 검거했던 것이다. 다음에는 간판에서 성역 두자를 떼어버렸다. 이것은 당국의 명령에 의하여 경찰이 강권을 발동해서 행한 것이다.
다음에는 유신회 사건인데 이 사건은 회원들과 교회와 일부 교인들을 매수하여 파괴하는 것이었다. 백5인사건과 성역 두자를 간판에서 뗄 때는 경찰력을 발동하여 직접적으로 했고, 후자의 경우에는 간접적으로 했다. 전자의 경우는 폭력행위였고, 후자의 경우는 합법적인 파괴행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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