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5)<제33화>종로YMCA의 항일운동(15)|이승만과 Y운동|전택부(제자 전택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워싱턴」에 있던 이승만은「프린스턴」대학의 박사학위를 받고 앞으로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할까 행각하고 있던 차에 1910년 여름 어느날 이상한 손님 한사람을 맞이했다. 그 손님은 한국에서 온 손님이었는데 한국인이 아니고「캐나다」인이었다. 그는 한국YMCA의 파송을 받아 교섭차 온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YMCA국제위원회의 총무「마트」박사의 공식서한을 가지고 와서 한국YMCA의 학생부 간사가 되어달라는 교섭이었다.
이미 그러한 교섭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차 이상재로부터 그러한 요청을 받았었으나 이승만은 자기의 신원보장 문제가 걱정이 되어서 망설이던 차에 국제위원회가 보장해주고 자기의 봉급까지 맡아준다기에 즉석에서 허락을 했다.
그는 1910년9월3일 조국을 떠난지 6년만에 「뉴요크」에서 배를 탔다.
「런던」·「파리」·「베를린」·「모스크바」등을 지나는 4주일간의 긴 여행을 끝내고「시베리아」광야를 달리는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바이칼」호에 들러 10월말께에 만주 땅을 통과했다.
압록강을 건넜다. 드디어 조국 땅을 밟은 것이다.
어슴프레나마 국치의 한일 합병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막상 조국 땅에 들어와 보니 일본경찰의 삼엄한 수색을 당해 참을 수 없는 굴욕과 적개심을 참을 수 없었다.
드디어 이승만은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6년 전 재회의 희망조차 없이 작별했던 그의 부친을 만나 같이 우는 광경은 모든 사람의 가슴도 뭉클했다. 그는 도착하는 즉시로 이상재를 찾아갔다.
그때의 사실에 대하여 이승만의 전기작가「올리버」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승재는 한국의「톨스토이」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거성이요, 효선비다. 그는 일찍이 감옥에서 이승만과 같이 기독교 신자가되고 그때부터 이두사람은 노소동락 하는 동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또 YMCA 총무이며 정열가인「질레트」를 찾아갔다』고 했다.
이와 같이 이승재와「질레트」를 먼저 방문한 것은 단순한 의례적인 방문이 아니라, 모종의 중대한 약속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이승만이 도착하자 제일먼저 한일은 전도 강연이었다.
『이 박사는 첫 주일을 5백70명 학생들에게 전도강연을 하는 것으로 지냈다. 그중 1백4명이 새로 조직된 성경연구반에 가입하게됐다.』『이 박사가 한국에 오기 전에는 세 학교에만 학생YMCA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중의 하나인 배제는 감독불충분으로 흐지부지 되었고, 묘동의 청년학원은 그 목적이 학생Y의 목적과 달랐기 때문에 당국에 의하여 해산되었고, 그리고 세 번째인 YMCA학관은 1년 전 가을부터 정식 발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1911년 9월말현재 여섯개 학생Y가 정식으로 조직되었으니 즉 배제학당,「세브란스」의전, 경신학교, 중앙Y학관, 묘동 청년학원 송부의 한영서원 등이었다.
이승만은 처음 6개월간은 서울에 있는 각 학교를 심방하다가 1911년 5월부터 그는「프락만」과 같이 전국 순회여행을 떠났다. 이때 이승만 자신이 국제위원회에 보낸 보고서내용을 소개하면-.
『우리는 5월16일 서울을 떠낫다가 6월21일에 돌아왔습니다. 37일간 우리는 13개 선교구역을 돌았으며, 33회의 집회에서 7천5백35명의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그 여정을 계산해본즉 우리는 2철3백「마일」을 여행한 셈입니다. 이 여정은 아홉 가지 방법으로 했습니다. 기차와 배와 말이나 나귀나 우마차 타고 또는 걸어서, 가마 또는 인력거 등을 타고…. 사립학교들은 거의다 재정난과 정치탄압으로 폐쇄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선교부 학교에만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전주(신흥학교)에서는 약14세 소년이 2백명의 소년을 1년동안 자기 성경반에 인도했습니다. 김천(신성학교)에서는 1백24명의 학생들이 그 졸업생 하나를 유교지역인 경상도에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그 선교사 이름은 차전명이라 했습니다. 차씨는 7개월만에 학생들이 보내준 여비를 가지고 휴가차 귀가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는 우리와 같은 차에 타고있었는데 그학교 교장인 「매륜」을 비롯하여 학생들과 선생들이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하고 있었습니다.…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송부에서 학생 하명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리 하명회에는 전국에서 21개 선교학교의 93명 학생대표가 모였습니다. 강사로서는「뉴요크」에서온「에디」씨 였습니다.
그 하명회야 말로 정말 성황을 이루었으며, 우리는 기독교 학교 학생들을 통하여 모든 불신자 학교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존경하는 친구들이여! 이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다음 학년동안에는「그리스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하명회는 두 번째의 하명회였다. 첫 번째의 하명회는 이승만이 오기전인 1910년6월22일부터 6일간 서울 불광동 밖에 있는 율현촌에서 있었다.
그러므로 조직적인 학생YMCA 운동은 이미 불붙고 있었다는 의미하며, 이승만은 이미 불붙기 시작한 학생Y운동을 더 부채질하고 조직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2차 하명회 때의 회장은 윤치호였다. 그리고 그 장소는 송부였는데 그곳에는 그가 경영하는 한영서원(송부 고보의 전신)이 있었다는 것이 의미 깊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