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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긴 추적벌인 일인 심천 종준씨 당시 한국인 책임자 만나러 내일 내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미쓰비시」 중공업공장근무 2백 명은 원폭희생
해방되던 1945년9월 징용에서 풀려 귀국 도중 태풍을 만나 침몰 사망한 1천 여명의 한국인 노무자들이 일본「쓰시마」(대마도)와「이끼」(일기)지방에 표류 되어 6개소에 가 매장됐다는 사실이 이를 추적하던 한 일본인에 의해 28년 만에 밝혀졌다.이는「히로시마」 (광도)에 원폭이 터질 때까지 약 1천2백 명의 징용 한국인들이 「미쓰비지」 (삼능) 중공업 공장에서 일했으는데도 종전 후 전혀 자취를 감춘 데 대해 의혹, 28년 동안 이들의 행방을 집요하게 추적해온 일본인 시인인 「후까가와·무네드지」 (심천종준)씨에 의해 밝혀진 것.또 생존자를 찾아오던 「후까가와」씨는 전쟁말기에 삼능 중공업에서 징용 한국인의 책임자(지도원)였던 허장수씨(59·금천시 평화2동)의 거처를 확인하는데 성공,20일「페리」편 호로 여씨를 만나러 온다.
『원폭재해연구』 라는 잡지의 편집 위원인 「후까가와」써에 따르면 2차 대전말기에 「미쓰비지」중공업에는 1천2백 여명의 징용 한국인이 있었으며「후까가와」써는 당시 지도원으로 있었다.
8월15일 종전이 되기까지 이중 2백 여명이 원폭재해로 희생되고 1천 여명이 생존한 것으로 확인됐다.
「후까가와」 씨는 2백46명의 한국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2백46명 가운데는 위장선씨와 노 씨의 동생 성옥씨 (당시20세) 도 있었다는 것.이들 징용 한국인들은 해방이 되자 뿔뿔이 헤어지거나 단체로 귀국 길에 올랐는데 호 성옥씨 등 2백30여명은 한달 만인 45년9월16일에 구주의 호전 항에서5백t급의 배를 세내 귀국 길에 올랐다가 이어 행방불명 된 것이다.
「후까오까」는 이들이 고국에 돌아갔다는 소식을 못 듣자 20년 동안 그 소식을 끈질기게 뒤쫓았다. 그 결과 이들이 출항직후 초속37·1m의 초 대형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전원이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 그때 이 태풍은 일본 관동지방 관상대에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10일 하오부터 18일에 걸쳐 구주와 대한해협일대를 강타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에 따라 「후꾸오까」 써는 익사한 한국인의 시체가 구주나 대마도 등 어디쯤에 표류 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당시 표류 시체나 매장한 사람 또는 목격자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의 추적은 성공되어 일기도의 표류에서「오다」(소전풍· 걍) 란 사람이 당시를 증언했다.바람이 분 이튿날 수 백구를 넘는 시체가 새까맣게 바닷가에 밀려왔다는 것이다.
이날을 전후해서 대마도와 구주해안에 표류한 시체는1천 여구가 넘는 것으로 증언 되었으며 「후까가와」 써가 추적한 결과「시모노세끼」(하관)와 구주등에서는 9월l6일,17일사이에 약 2척의 일본 어선들이 귀국한국인을 태우고 출항한 것으로 나타나 피해가 엄청났던 것으로 보이고있다.
「후까가와」 씨가 구주∼대마도· 일기 등에서 만난 목격자의 증언은l. ▲대마도의 목격자 「다찌바나」 씨 (당시 차장) 는 3년 전 사망했다.사망하기 전「쓰루나게」등 증언 거리에 많은 시체가 밀려온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자손들에게 얘기해왔다고 친척인「나가으」 (영미전길) 씨가 말했다.
▲대마도 하현 미진도 정의 소전풍씨 (50) 는 표착 한국인을 묻어주었다면서 집단 매장지를 안내했다.▲또 같은 마을의 아비 송태낭씨 (형) 는 20구의 한국인시체를 묻었다고 증언.
▲일기섬의 하초웅씨(35)는 70년9월25일 뇌호 일대에 무수히 표류해 오는 것을 보았다.추정해서 약5백구는 되는 듯 했다고 증언. 그 뒤 이 지역을 매립 했을 때 많은 유골이 나와 한곳에 모으고 비석을 세웠다고 말했다.
「후까가와」씨는 이 같은 사실이 밝혀지자 늦었지만 이 유골을 모아 귀국 시켜야 한다는 민간운동을 일으키고 있으며· 일본 정부에도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후까가와」 씨는 이밖에 생존자로서 20년 만에 유장수씨의 주소를 확인한 것이다.
한편 우 씨는 석도에 살다가 2차대전이 터지자 공장의 통역관 한국인 책임자로 일했다는 것이다.해방 후 데리고있던 한국인2백50여 명을 인솔, 호전항으로 와서 배를 타려다가 예정이 늦어져 광도에 돌아갔다가 오는 사이 배가 떠나 인솔했던 2백50명과는 영원히 헤어졌다는 것이다.중산 종해안에 서있는 한국인 위령비.현지 주민들이 세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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