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1)제33화 종로 YMCA의 항일운동(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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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박승봉과 최광옥>
전회에서 이상재가 59세의 나이로 YMCA종교부 총무로 들어갔다는 얘기를 했다. 그 당시 59세의 나이라면 노인이다. 이런 노인으로서 이상재는 YMCA총무도 아닌 종교부 간사로 들어갔다는 것은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를 종교부 총무라고 부른 것은 간사라고 부르기가 미안해서 부른 것이지, 본래 YMCA에 종교부 총무란 직제가 있은 것은 아니다.
이상재는 근대사회의 지도자 중 누구보다도 연세가 높은 지도자였다. 그는 갑신정변의 주동인물인 김옥균보다도 l년 위이고, 서재필보다는 13년 위이고, 윤치호보다는 l5년, 손병희보다는 11년, 이승만보다는 25년, 고종태황제보다도 3년이나 더 위인 고령자였다.
이러한 고령의 인물이 어찌하여 총무도 아닌 일개 간사로 YMCA에 들어갔을까? 여기서 잠시 이상재가 YMCA 종교부 간사로 들어가던 1907, 8년도의 YMCA지도자들의 얘기를 몇 회에 걸쳐 말하고자 한다.
우선 그보다 먼저 종교부 간사로 임명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최광옥이란 팔팔한 청년이었다. 그는 1879년 평남중화태생으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학생회조직과 합병반대연설을 하다가 백천산 속에서 피를 토하고 33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는 주시경과 함께 한글의 개척자이며 문법학자이다. 그는 백낙준 박사의 장인이며 최이권씨의 부친이다. 그는 일본유학에서 돌아오자 그 당시 이사이던 「어비슨」(어비신)의 추천으로 종교부 간사로 들어왔던 것이다. 불과 몇 달 동안이긴 하나 그는 초대 종교부 간사이며, 이상재는 2대 간사이다. 외국인이사들은 그의 애국심과 신앙심을 이용해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 시작할 때 선교사들은 상류계급의 지식층과 똑똑한 청년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YMCA를 창설했다는 말을 했다. 사실상 그들의 의도는 이루어졌었다. 우선 윤치호·이상재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전부 YMCA에 들어왔으니 그대로 되었고, 조남복·박승봉과 같은 최고 양반들이 들어왔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1908년 가을 이상재가 종교부 총무로 들어가기 전의 YMCA구성을 보면 윤치호는 부회장, 이상재는 교육부위원장, 조남복은 친원부위원장이었다. 친원부라함은 오늘날의 사회부, 또는 회원부와 맞먹는 부서이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조남복은 대원군의 외손자, 즉 고종의 누님의 아들이다. 그는 일찌기 기독교 신자가 되어 그의 형 조남승과 같이 성경반을 조직하고 복음전도를 한 사람이다. 이와 같은 최고 양반이 YMCA에 들어왔었다.
박승봉은 l871년 생으로 이상재 보다는 11년 아래이고 1895년 서광범이 주미공사로 갈 때 참서관으로 그를 수행했다. 귀국 후 창원감리(부산) 덕원감리(원) 등 외국인 상대의 관직을 역임했고, 1907년에는 궁내부 협판, 즉 차관이 됐다. 그는 소위 죽동 박씨라 해서 양반 중에도 양반이다. 박정양과도 일가이다. 그의 가문은 순조대왕의 외가이다.
순조 이후의 임금들은 죄다 양자로 들어온 임금들이기 때문에 고종이라도 무시 못하는 쩡쩡 울리는 양반이었다. 박영효도 같은 가문이다 그는 일찌기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과 미국으로 망명 다닐 때 이미 내심으로는 기독교에 호감을 가진 사람이며, 체면상 기독교회에는 나갈 수 없다고 해서 자기대신 내세웠던 인물이 곧 박승봉이다. 박영효는 승봉에게 『나라를 구하는 길은 기독교밖에 없어, 자네는 내대신 교회에 나가서 일하게! 그리고 기차정거장이 있는 고을마다 중학교 하나씩만 세우면 수가 날테니 교육사업에 힘쓰게!』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박승봉이 교회장로가 되고 YMCA이사까지 됐다. 하나 그가 해아밀사 사건의 배후 인물이란 사실은 아는 사람이 적다. 그때 그는 궁내부협판, 즉 차관이었다. 박승봉은 고종과 연락하면서 이준 등에게 여비를 대주었고, 「헤이그」에서 발표된 황제의 밀서가 위조가 아닌 당시 궁내부 전용의 공문용지에다 황제의 어인과 「사인」이 찍힌 당당한 공식문서임이 드러나자, 이는 반드시 박승봉의 장난이라 해서 총리대신 이완용은 그를 파면시켰다. 하나 고종은 그럴 수가 없어 어명으로 그를 영유관찰사를 시켜 일시 지방에 내려보냈던 것이다.
관찰사로 있는 동안 그는 남강 이승훈을 불러 들여서 정주에다 오산학교를 설립케 한 것이 유명하다. 이승훈 전기에도 『그때 마침 평안북도 관찰사로 박승봉이 새로 부임하여…남강이 사재를 기울여 학교를 경영한다는 말을 듣고 한번 만나기를 원했다…. 관찰사는 남강의 중학교 설립계획을 자세히 듣고 나서 유림들을 권하여 향교 재산의 일부를 남강에게 기부케 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라고 썼는데, 세도가 박승봉이 아니었던들 그 완고한 유림들이 그 큰 재산을 내어놓지 않았을 것이며, 그 재산이 아니었던들 남강도 오산학교를 그처럼 크게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1년 후 박승봉은 상경하여 YMCA이사가 되고 안국동교회를 설립하여 장로가 되었다. 더우기 그는 한국 최초의 민간인 출판사 창문사를 설립하여 출판문화에 힘썼다. 그리고 그는 무조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유학적으로 성경을 해석했다. 그때 한창 시비가 많았던 제사문제를 위하여 구약성서 신명기를 주석했다. 하나 이 주석은 아깝게도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만약 그것이 남아 있었더라면 『한국적 신학의 수립』, 특히 교의학 부문에 큰 공헌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승봉은 오늘날까지 파묻혀 있다. <계속><제자 전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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