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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도괴 위기의 국보 11호 동양 최고·최대 익산 미륵사지 석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백제 때 건립, 높이 14.24m>
백제 불교문화의 상징이자 현존하는 석탑 중 동양 최고·최대인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전북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소재)이 반세기가 넘도록 손을 안 써 도괴의 위험성이 짙어가고 있다.
이리에서 서북쪽 13㎞ 들판에 자리잡은 이 미륵 석탑은 현 높이 14.24m로 문헌에도 건립 연대가 백제 무왕 때(서기 600∼610년)로 되어 있고, 사가들도 최고·최대의 석탑이라는 것이 정설이나 일제 때인 1915년이래 한번도 보수를 않은 채 있다는 것이다. 안내판 하나 없어 초행길에 찾기조차 힘든 이 탑은 1만2천 평의 황폐된 옛 절터에 볼품마저 사납게 서있다.
서기 719년(서기 660년 백제 멸망 후 신라 성덕왕 때) 뇌진으로 탑신의 절반이 파괴되자 일제 때(1915년)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현 모습으로 「시멘트」벽을 발라 보수한 채 오늘에 이른 것.
이 때문에 탑신 안으로 비가 새고 탑의 세석 사이사이에 균열이 나있다.
이 탑은 본래 평면 방형의 탑.
서남부의 탑신이 파괴되어 동북 면의 6층 한쪽만 남게되자 당시 일본문화재 당국은 파괴된 면의 기괴부 지대석에서부터 6층까지 「시멘트」보호벽을 쌓고 세석 사이사이엔 「시멘트」를 발라놓았다.

<곳곳에 금가 빗물 스며들어>
그러나 「시멘트」벽은 축조한지 58년이나 돼 1층, 3층 사이 가로로 2m가량 금이 가 균열이 나있고 군데군데 실금이 나있다.
비가 오면 이 봄 사이로 스며든 빗물은 탑신 1층 중심부에 있는 방왕 서쪽 부분으로 스며들고있다.
또 탑 전체 평방·창방 등 세석 사이마다 바른 「시멘트」도 삭아 여러 군데 공간이 나있다. 더구나 일인들이 보수 때 탑신을 떠받치도록 동쪽 위에 남북으로 걸쳐놓은 길이 2m의 철주는 삭아서 구멍이 나 제 힘을 못 가누고 있어 철주 위의 큰 세석 사이가 1cm 가량 공간이 생긴 곳이 여러 군데나 됐다.
탑을 떠받치고 있는 기단부의 거대한 지대석 2백여 점도 언제부터인지 파헤쳐진 채 무질서하게 널려져 있는 실정이다.
이 미륵 석탑은 백제 때 동양에서 제일 큰 사찰이던 미륵사를 지을 때 함께 건립된 것인데 사찰은 이조 중엽 연산군 때 폐찰 되어 사지만 남아있는 것으로 문헌에 기록돼 있다.
미륵사는 무왕의 「서동설화」가 얽힌 명찰. 왕자 서동(무왕의 아명)은 신라 26대 신평왕의 셋째 딸 선화 공주의 미색에 반했다.

<미륵사, 서동설화 얽힌 명찰>
나경(경주)에 잠입한 서동은 아이들에게 구운 감자를 나누어주고 『선화 공주가 밤이 되면 서동과 잠통한다『(선화 공주주은, 타밀지가량치고, 서동방을야의, 난을포유거여)는 동요를 부르게 했다.
이 동여 때문에 궁에서 쫓겨난 선화 공주는 백제로 넘어가 서동과 결혼하여 하루는 무왕과 왕비가 용화산(현 미륵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니 미륵 삼존이 못 가에 나타났다.
이를 본 왕비는 이 못을 메워 큰절을 세우는 것이 소원이라 해서 절을 지은 것이 미륵사의 기원이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사지의 서쪽에 자리잡은 미륵 석탑은 원래 그 동쪽에 같은 규모의 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사가들은 보고 있다.
미륵 석탑은 백제 불교문화 연구에서뿐만 아니라 목탑 양식을 본뜬 석탑의 시원으로 문화사 연구에 가치가 있고 원래는 7층으로 20m 내외의 거탑이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이 탑이 국보로 지정된 것은 1938년. 현재까지도 국보 주위의 정화는 거의 안 돼있는 실정이다.
관할 군에서 관리인 1명을 두는 정도이고 보호 철책이나 경고판 하나 없다. 가을이면 하루에도 2∼3백 명의 수학여행 학생들이 이 탑을 찾아오고 일인 학자들이 자주 답사를 온다는 것이다.

<완전해체 후 원형 복원해야>
익산군 문화 보호협회(지부장 송상규) 등 관계기관은 『일제 때 마치 「토치카」모양으로 보수 해놓은 국보가 붕괴 일보전』이라고 주장, 옛 모습대로 복원해줄 것을 여러 번 요로에 건의했다.
홍군표씨(40·익산군 문화재 위원)는 『매년 일인 학자만도 수십 명씩 답사를 오는데 일인들이 보수한 그대로여서 부끄럽다』고 했다.
또 홍씨는 탑 네 귀퉁이에 하나 씩 서있는 어른 무릎 높이의 불상 중 하나가 언제인지 없어졌다며 『그 하나를 군산항까지만 운반 해다 주면 천만 원을 주겠다는 일본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이리·익산 주민들은 『아마 미륵 탑이 경주 성에 있었다면 벌써 복원됐을 것』이라며 하루 빨리 복원해줄 것을 요망하고 있다.
정영호 교수(단대 박물관장)는 완전해체,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
현 상태로도 원형을 찾을 수 있어 전문가들의 기초 조사로 복원도를 그려 해체, 복원해야 된다고 했다.
정 교수는 기단부에서부터 쌓아올린 「시멘트」벽과 석축 속에 없어진 일부 탑의 옥개가 들어있을 것으로 보고 부족 되는 석재는 원자재인 용화산의 화강암을 써서 복원이 가능할 것이라 했다.
진홍섭 교수(이화여대 박물관장)도 『차원 높은 이 탑의 학술 조사가 안 돼있다』며 『현 상태는 흉측하여 대책이 마련돼야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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