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5)제33화 종로 YMCA의 항일운동(5)|<제자 전택부>전택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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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종, 경상비 보조>
1905년 9월 노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한국은 완전히 일본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조정은 매국 간신배들로 득실거리자 이에 뼈저린 고독을 느낀 고종은 강직하고 충의의 한 사람인 이상재를 불러들여 의정부 참찬의 직위를 맡기었다.
그러나 이상재는『신이 비록 일만번 주륙을 당할지언정 이러한 매국하는 도적들과는 같이 설 수 없사온 즉, 폐하께서는 만일 신이 그르다고 생각하시거든 신의 목을 베이사 모든 도적들에게 사례하시고, 만일 신의 말이 옳다고 여기시거든 모든 도적들의 목을 베이사 모든 국민에게 사례하소서』하는 강직한 상소를 올리고 물러서려 하였으나,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끝끝내 물리칠 수 없어 그 직의에 취임하게 되었다.
하나 아무리 정무에 충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미 일제의 지배정치가 시작되어 외교권을 비롯하여 군사권·재정권까지 거의 다 빼앗기고 마니 정부의 고관인들 어찌 하랴. 이상재는 의정부 참찬으로서의 정무보다 기독교에 더 큰 기대를 걸고 YMCA에만 나갔다. 윤치호도 그랬고, 이원경 유성준 안국선 김정식 박승봉 홍재기 남궁억 조종만 등 애국지사들이 다 YMCA에만 나갔다.
한편 새로 부임해온 침략의 거장「이또」는 YMCA세력을 만만치 않다고 여기면서 지그시 접근해 왔다. 한국인 세력보다 외국인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임하는 즉시로 YMCA의 외국인 간부들에게 의례적인 방문을 하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에 마음을 썼다. 되도록 외국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자는 것이 그의 속셈이었다.
고종황제에 대해서는 더한층 조심을 했다. 웬만한 일이라면 다 묵인해서 고종의 환심을 사자는 것이 그의 술책이었다. 그는 고종의 YMCA에 대한 마음의 방향을 잘 알고 있었다. 고종의 심복이 거기에 있고, 생명의 은인이 거기에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인은 제외하고라도「헐버트」는 황제의 밀사로 보낼이 만큼 심복인 사람이며「게일」「언더우드」「어비슨」등은 l895년 민비 암살사건으로 고종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침실에까지 들어와 야경을 보아준 은인이며,「브라운」은 고종의 재정고문으로서 궁중살림까지 보아준 심복이었는데 이분들이 다 YMCA의 자문위원장이나 회장이나 이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우기「이또」는 고종이 YMCA에다가 1년에 1만환씩 경상비 보조를 주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 YMCA회장은「게일」이고, 재단 관리 이사는「브라운」이었는데 그들은 1906년부터 교육사업 등이 확장되면서 정부에 대하여 경상비 보조를 신청했던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교섭이었다. 고종에 대한 선교사들의 존경심으로 보든지, 과거의 인연으로 보든지, 또한 고종이 선교사들에 대한 신임도로 보든지, YMCA에 대한 기대로 보든지, YMCA가 국가에 유익한 사업을 하기 위하여 재정보조를 달라는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이또」로서는 이것을 방해할 수는 있었다. 이미 그때는 우리 정부의 외교권만 아니라 행정권·재정권까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의 재정고문이며 심복이던「브라운」은 파면이 되고, 그 대신「메가다」란 일본인이 와있었기 때문이다.「메가다」는 한국정부와 화폐의 정리 및 개혁에 관한 몇 가지 계약을 체결하고 그 업무를 일본 제일은행으로 하여금 대행케 했던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제일은행 경성지점장은「다까기」란 일인인데 YMCA의 이사 중 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관계로 보아 아무리 고종이 1만환 보조를 원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공모하여 이를 거절할 수 있었던 때다.
고종이 YMCA를 도와준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1907년 회관을 지을 때 기본금조로 1만환을 따로 하사한 일이 있었다. 돈만 하사할 뿐 아니라 그 아드님 영친왕을 친히 정초식에 참석케 하고『일천구백칠년』이란 초석의 글까지 쓰게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영친왕은 11세의 어린애요, 일본으로 인질이 되어 끌려가기 직전이었다.
그때「이또」는 그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과 같이 영친왕을 시종하여 친히 정초식에 참석했던 것이다.
물론 그가 그런 자리에 안나와도 무방했지만, 이것은 순전히 외교적인 효과를 노린 흉측한「제스처」였다. 첫째로 고종에 대하여 허례나마 갖추자는 것이며, 둘째로 미국의 체신장관을 지낸바 있는 유력한 인물의 거액기부로 짓는 정초식에 일본인이 가만있을 수 없었던 것이며, 세째로 그 당시 민중의 여론으로 보아 이런 일에 외면하다가는 큰 손해될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또」는 위세 당당하게 영친왕을 시종 들고 나와 황실을 존경하는 체 했다. 그리고 외국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체 했다. 여기서부터 일제침략의 마수가 YMCA안에까지 파고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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