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3)<제33화>종로YMCA의 항일운동(3)|전택부(제자 전택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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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위기의 산물>
【무릇 YMCA란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변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44년에 YMCA가 영국에서 처음 창립되었는데 그 당시 영국사회는 큰 불안과 변동기에 처해 있었다.
측 산업혁명이후 갑자기 일어나는 자본가들의 착취를 당하던 근로 청소년 들어 YMCA를 창설했던 것이다. 다시말 하면 당시 영국사회의 불안과 위기가 없었던들 YMCA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YMCA도 사회적 불안과 위기의 산물이었다. 하나는 의화단폭동이 준 불안과 위기요, 하나는 노·일 전쟁 이준 불안과 위기이다. 하나는 간접적인 불안과 위기요 ,하나는 직접적인 불안과 위기이다.
우선 의화단 사건부터 말해본다. 이 사건은 1899년부터1900넌 까지 그 당시 청국의 일부 과격분자들이 소위 부청멸양이란 구호 밑에서 중국산동생일대와 배경지방의 외국인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을 닥치는 데로 잡아죽이고 난동을 부린 젓이다.
이때 중국에 와있던 선교사들이 한국에 피난을 왔었는데, 그 중에 천진에 주재하던「라이어망」 YMCA간사가 끼여있었다 .그는 1900년6월부터 약4개월잔 한국에서 피난살이를 하는 동안 선교사들과 접촉을 하게되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을 연고 YMCA본부에 보고하여 한국YMCA창설을 서두르게되었다. 그 결과로 1901년에「질례든」(길례태)란 유능한 YMCA간사를 파송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중국의 의화단 난동이 없었던들 YMCA간사가 오지 못 했을 것이며, 그가 아니었던들YMCA가 빨리 창설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다음 노·일 전쟁은 우리국토에서 직접 일어난 전쟁이며, 우리 국토를 점령하기 위한 각 대국들의 각축전이었다. 이 전쟁은 1904년 초에 터졌지만 7,8년 전부터 이미 그 각축전은 시작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은 1896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조직하여 「러시아」의 세력에 저항을 했고 「헐버트」 「알레」 「브라운」 등 외국인들은 일본세력이 아니꼬와 YMCA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선교사들의 요청과「라이언」씨의 추천에 의하여 l901년9월「질테튼」란 Y간사가 파송 되어 왔다. 그는「예일」대학 출신으로서 범세계적인 성격의 유능한 간사였다. 그는 내한하는 즉시로 우선 배제학당에다 기독 학생회를 조직했다. 지금도 생존해 있는 윤성렬 목사는 『초대회장은 민찬호, 사찰에는 육정수, 자기는 평 회원이었는데「질레든」씨가 한 달에 한 번씩토론회를 지도해주었다』고 말한다.
또한 「질레트」씨는 이 사실을 YMCA국제회의에 보고하여 정식으로 YMCA세계연맹에 가맹케 했다.
YMCA창립총회는 1903닌10월28일 정동 공동 서적 실(유니언·클럽)에서 열렸다. 서울장안의 저명한 내외인사 37명이 모인 것이다. 이 사실을 「코리아·리뷰」주필인 동시에 YMCA창설을 위한 자문위원장이던 「헐버트」씨는 대략 다음과. 같은 기사를 쨌다.
「「필레트」씨를 도와주기 위하여 조직된 자문 위원회는 회견초안을 작성하여 그 위원장이 실명을 했다「헐버든」씨가 의장이 되고「질레트」씨가 서기로 선출됐다 「어비슨」박사의 동의로 창립총회가 성립됐다. 즉시 현장초안이 정식 통과되고 12명의 이사투표에 들어갔다.
선출된 이사는「브라운」 「다까끼」 「터너」「언더우드」 「켄머」 「게얼」 「하운셜」 「샤프」 「헐버튼」 김규식 여병현 등이었다.
이 12명 이사의 성분과 국적을 분석해보면 한국·미국·영국·일본 등 4개 국민으로 구성돼 있으며, 직업으로서는 선교사·의사·은행가·교육가·언론인·행정가 및 학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37명의 창립회원 중에는 중국인도 끼여있어 사실상 5개국국민의 국제기구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한국인 이정가 2명 만이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수치이고 불만이다 이상재씨는 그때 감옥에 있었고, 윤치호씨는 그때 좌천되어 덕원 천안 목포 등 감리로 전전하면서 중앙에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정하게도 김규식씨는 미국 유학에서 갓돌아 왔으며 여병현씨도 미국과 영국을 거쳐 귀국해 있었기 때문에, 또한 그들은 영어를 안다고 해서 이사가 되었지만, 한국 YMCA는 한국인에 의하여 한국인을 위하여, 한국인의 소유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2명의한국인만이 이사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수치요 불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2명 이사 중에는「다까끼」란 일본인 1명이 끼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앙도 좋고 유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 찌기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일본 YMCA의 재정이사까지 지낸 사람이며, 제일은행경성지점장이 되어 서울에 와있었다. 하나 아무리 그가 착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본에 대한 감정이 날카로운 때에 일본인이 창립이사로 뽑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외국인들의 우리의 감정을 외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더욱 느낄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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