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정말 황당한 '의료 민영화' 괴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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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윤석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심사평가연구소장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이른바 의료 민영화와 관련된 괴담이 돌고 있다. 정부의 발표대로 의료법을 개정하면 ‘맹장 수술 받을 때 1500만원이 든다’ ‘분만비는 1000만원 내야 한다’ 등의 황당한 이야기다.

근원을 쫓아가 보니 정부가 발표한 ‘제4차 무역투자활성화 대책’이 원인을 제공했다. 이 대책에는 비영리법인인 병원이 영리 목적의 자회사 설립을 허용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병원이 세운 자회사는 숙박업·여행업 등 의료관광사업, 의약품 개발, 화장품·건강보조식품과 관련된 사업, 온천·목욕장·체육시설 등과 관련된 사업 등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반대론자들은 이렇게 되면 환자 진료에 몰입해야 할 병원이 돈벌이가 되는 부대사업에만 집중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건강보험체계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국민 모두가 경험하고 있듯이 한국은 사회보험 방식의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 국민이 지급하는 전체 의료비의 약 80% 이상이 건강보험과 관련돼 지출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대부분은 사회보험 방식의 건강보험제도나 조세 방식의 의료제도를 통해 국민에게 보편적 의료 보장을 제공하고 있다. 다만 미국의 경우가 독특하게 노인이나 저소득층 등에게만 사회보험 방식의 의료제도를 운영하고 근로계층에는 민간 보험을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반대론자들은 한국 의료제도가 미국식으로 변해갈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렇게 될 확률은 ‘0%’ 에 가깝다.

어느 나라 국민이든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그 나라가 경험한 사회제도로부터 훈련받게 된다. 현재 영국은 조세를 기반으로 한 국영의료제도를 택하고 있다. 이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곧이어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전쟁 영웅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 정부 대신 국영 의료를 공약으로 내세운 노동당 정부를 선택한 결과다. 2차 대전 당시 전시 상황에서 국가가 제공하는 배급식 의료제도에 익숙했던 영국민이 자연스럽게 국영의료제도를 받아들인 결과로 해석된다.

 한국 국민의 의료서비스에 대한 의식은 어떠할까. 1989년 전국민 건강보험제도가 도입된 이래 약 25년이 흐른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건강보험제도를 멀리하고 미국식의 민영화된 의료제도를 택할 국민이 있을까. 아마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 국민의 의료서비스에 대한 인식은 현재의 건강보험제도와 밀접하게 결합돼 있기 때문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정책을 집행하려는 무모한 정당이나 행정부가 존재하리라는 상상은 자유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것이다. 선진국 중 독특한 의료제도가 있는 미국마저도 최근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과 유사한 보편적 의료보장 방식으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거친 방식의 문제 제기가 드물지 않게 커다란 사회적 의제로 등장하게 될까. 아마도 이는 한국 사회가 ‘신뢰’라는 사회적 자산이 매우 부족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정부가 특정 대책을 발표하면 일단 그 대책을 받아들이고 건전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음모론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무조건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는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정책 환경에서는 정부도 국민의 삶과 밀접한 정책을 제시할 때마다 관련 이해관계자들과 지나칠 정도로 충분한 소통을 거쳐야 한다.

다시 결론을 내리자면 한국에서 미국식의 의료 민영화는 있을 수도 없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다. 그런 괴담이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

윤석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심사평가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