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에 미친 중동전의 충격파-크렘린 내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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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련 군부로 대표되는 「크렘린」강경파들은 중동전을 계기로 최근 그들이 온건파들에게 빼앗겼던 일부주도권을 급속히 회복했다. 전쟁이 나자마자 국방상 「안드레이·그레치코」는 오랫동안 「프라우다」지가 게재 금지해 온 강경파의 주장을 이 신문에 슬쩍 게재시키는데 성공했다.
여러달 동안 「프라우다」지는 미·소 전쟁이 이상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논조를 폄으로써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서기장의 「평화정책」을 지원해 왔었다. 그런데 「그레치코」는 최근 「프라우다」에 게재된 2차대전 중의 전투를 논한, 겉으로 보기에는 역사물 같은 한 논문에서 중동전에 언급, 미· 소간의 전쟁은 아직도 가능한 것이라는 암시를 던졌던 것이다.
그의 결론은 『제국주의반동세력은 아직도 전쟁을 그들의 침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인데 문맥상 「제국주의 반동세력」이란 바로 미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레치코」와 「크렘린」안의 그의 동조 정치가들이 소련 내부에서 전개되는 토론 중에 정책의 지침으로 공인 받으려 해 온 주장은 바로 이 점이었다.
이들의 견해로는 만약 전쟁의 위협이 실재한다면 그 논리적 귀결로서 국내외 정책이 전쟁 가능성을 현재보다는 더 반영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브레즈네프」의 신속한 대 서구화해를 반대하는 주장의 핵심은 화해에 너무 열중함으로써 앞으로 대결이 있을 경우 소련을 약화시키게 될 양보를 그가 하고 있다는데 있다.
따라서 「크렘린」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서 화해에 관한 오랜 논쟁과 소련의 중동정책이 보이고 있는 요철 사이에는 분명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한다. 최근 수년 동안 「크렘린」이 취한 행동들은 중동에서의 소련의 군사적 입장을 강화해야 된다는 독수리파들의 주장이 반영되어 있다. 그와 반면 「아랍」인들은 믿을 수 없으며 경제적 부담만 주는 존재라는 견해를 반영하는 행동도 나타났었다.
67년 중동 전쟁 중 「아랍」측을 위해 개입하라는 강경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 사이에 논쟁이 너무나 격렬하여 결국 전 비밀경찰 두목이며 정치국원인 「알렉산드르·셸레핀」을 위시한 몇몇 지도자들이 강등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정치국원으로 남아 있다. 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기 수주 전 「시리아」에 가 있던 소련기술자들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크렘린」안의 독수리파는 또 한번 물리는 듯이 보였다.
그때 소련은 새 전쟁을 위해 「아랍」측이 요구한 장비를 거부했다. 「크렘린」은 이번 전쟁을 원치 않은 듯했다. 소련 지도자들은 전쟁을 한댔자 또 「아랍」측이 질 것이며 그 결과 소련 입장만 난처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중동전에 대한 소련이 발표한 첫 성명은 비교적 온건한 것이었다.
이 성명은 「그레치코」의 논문과 같은 날에 나왔는데 이 두 가지 발표문 사이의 상이점은 그때 정치국을 지배하고 있던 비둘기파와 소수 독수리마 사이의 상반된 견해를 잘 드러내 주었다.
그러나 전쟁 초단계에 「아랍」측이 우세해지자 소련무기의 「아랍」유입이 재개되었던 것이다. 또 소련 외교관들은 나머지 「아랍」국가들에 참전할 것을 종용했다.
그렇다면 정치국이 새로운 사태에 따라 단순히 종전 정책을 바꾼 것인가, 아니면 정치국 안의 독수리파가 다수파로 득세했는가? 정치국 안의 세력균형이야 어떻든 간에 문제는 그 결과다. 정치국은 과거의 온건한 접근 방법을 버리고 「아랍」측의 군사활동을 지원하는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과거보다 훨씬 강경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국의 변질은 현재 국내외 정책에 걸쳐서 강경파들의 도전을 받고 있는 「브레즈네프」의 입장을 악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얼마 후에 전진하기 위해 전술적 후퇴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전쟁이나 정치에 있어서는 그런 전술은 몬모을 수반하는 것이다. 【빅토르·조르자=공산권문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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