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제6화 가등청정의 볼모 일요상인 서한(1)|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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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서고금을 통해 전쟁은 본래가 잔인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전쟁이 과대망상증에 걸린 폭군이나 독재자에 의해 저질러졌을 때의 잔인성은 인간 이성으로써는 통제할 수 없는 비극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그런 전쟁은 싸움터에서 전사들끼리의 살육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비전투원인 아녀자·노인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그 와중에 끌어넣고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야 만다. 인간적인 신의나 인간사회의 공통적 도덕률마저도 거부당하는 비극이 이래서 도처에서 벌어지게 마련이다.
가까이 6·25동란을 겪은 우리로서는 얼마든지 그런 사례들을 목도했을 것이다.
-가령 전쟁 중에 어린 자식을 길가에서 잃었다 치자. 전쟁이 끝나고서도 20년간이나 그 자식의 생사조차 모르고 지내던 차 하루아침 별안간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풍문을 들었다고 치자. 그러나 그 아이는 적군에 붙잡혀 멀리 이국 땅에 볼모로 가 있고, 부모형제들에게 안부편지 한장 마음놓고 전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치자. 가령, 우리 자신이 이런 경우를 당했다 치면 그때 그런 풍문의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라면 과연 어떤 심정을 가질 것인가?

<한국인 서대남의 후신>
실상, 이런 상황은 전쟁을 겪은 국민이면 흔히 있는 일이기는 하나 그래도 그것이 하나의 「몬도가네」(개 같은 세상)일 수밖에 없음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본 연재 제6화로 소개하려는 일요상인 얘기도 어쩌면 이런, 「몬도가네」의 잔인성을 다시 한번 보여주기 위한 성인용 우화인지도 모른다.
서부구주의 웅도「구마모또」(웅본)시는 구주에선 세번째 가는 대도시(인국 약45만명)이다. 이곳도 아득한 옛 선사시대부터 한국과는 적지 않은 인연을 맺은 곳으로 오늘날 이 도시주변 여러 곳에서는 그 당시 한국에서 건너왔던 「북방 기마민족」들이 남긴 「고적문화」유적들(뒤에 다시 취급)이 수없이 흩어져 있다. 좀더 가까운 한국과 이 고장과의 관계는 오늘날 이 도시 안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소위 『웅본명산 조선이』(엿) 간판을 보고서도 느낄 수 있다.
대체 한국의 엿이 어떻게 해서 「웅본명산」으로 둔갑했는지 그것부터가 궁금한 얘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전쟁과 관련됐다는 것을 곧 이해하게 된다. 저 처참했던 임진·정유왜란 당시 한국에 침공하여 한국 깨엿 맛을 처음 먹어 보고 그만 그 독특한 풍미에 침을 흘린 왜병들이 끝내 그 제조법을 배워 이곳에 전승케 한 것이다.
웅본시 서북쪽 화원정
주변·언덕배기 전체를 차지한 한 대찰이 있는데 이 절이 곧 이 웅본산 한국 엿의 근원지인 본묘사인 것이다. 그러나 발성산 몬묘사 또는 비후웅본 본묘사로 불리는 이 절과 한국과의 인연은 비단 이 엿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인연이란 이 절을 세운 사람이 다름 아닌 가등청정이라고 만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임란 때 우리 나라에 침범한 적장 가운데서도 가장 악명이 높았던 장수이거니와, 이 절은 바로 그 『청정공의 어묘소』인 것이다. 게다가 어디 그뿐인가. 이 절(일연종회수문파구주총본사)의 3대조로서 학덕 높기로 이름 있던 일요상인 (일명 고려학연성인)이야말로, 실은 그 가등청정에 볼모로 붙잡혀 온 한국 소년 서대남의 후신인 것이다. 지금도 이 절에는 약 3백70년 전, 일요상인과 고국에 계신 그 엄친 서수희(일명 천갑·경남하동군거주의 사림)사이에 오갔던 눈물겨운 사연의 편지들이 고스란히 간직 돼 있다. 편지를 먼저 띄운 쪽은 아버지 편이다. 그는 27년간이나 생사조차 모르고 지내던 아들이 적국에 중이 돼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풍문에 전해 듣고 복바치는 설움과 노여움에 몸을 떨었다. 그럴 수야 없지, 그럴 수야 없지 하는 것이 그 노부의 심정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붓을 들었다.

<27년 지나서 생사 알아>
『구주비후국 웅본 본모사의 학영일요성인에게. 조선국 하동에 사는 아비 서천갑이 아들 서대남에게 주려고 이 글을 인편으로 부치노라』고 썼다. 이렇게 시작한 그 눈물의 서한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원문 한문)
-계사년(선조26년·1593년)7월 네가 쌍계동 보현암이란 일가 아저씨 암자에 가 있다가 왜인들에게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은 뒤 부모는 이날까지 네 생사를 전혀 알지 못하고, 나는 네 어미와 더불어 밤낮을 울음으로 지냈노라.
그러던 중 정미년(선조40년·1607년) 우리 나라 통신사가 일본에 들어갔을 때, 마침 이곳 하동 고을의 관인이 길가에서 너를 만나 성명을 물으니, 네 속명이 서대남이요, 부친 함자는 서찬갑씨라 하더라는 말을 듣고 돌아와서 나에게 알려 주었다. 그래서 나는 비로소 네가 일본 경중 오산이란 곳에 살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마는 네 어미와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북바치는 설움을 참을 수 없었다…』
아들의 생존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전란이 끝난 지 벌써 15년이 지났을 때였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도망쳐서라도 고국에 돌아왔을 텐데, 부모에게 생사 기별조차 아니하고 더군다나 적국에서 중이 되어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으랴. 그래서 아버지는 설마하니 내 아들이 그럴 수야 있겠느냐 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보기로 했고 또 좀더 확실한 소식을 알고 난 다음에야 편지를 띄워야지 하고 다시 7년의 세월을 흘려 보냈었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같은 마을의 하경남이란 친구가 일본에 건너갔다가 직접 만나보고 돌아와서, 아들이 사는 주소하며 법명까지를 소상히 전해 주었다. 그래서 아들을 그리는 부정은 이 편지를 쓰지 않고서는 참을 길이 없게 되었다,
『여호재소식권희용약이부한여망부모생육지은, 안거이지구불출애야. 여자족의식어일본이불환야, 위승일거해외이불환야…』
(『네가 살아 잘 있다는 소식 듣고 뛸 듯이 기쁘다면 서도, 네가 부모의 낳아서 기른 은혜를 잊었으니 실로 애달프고 서운한 일이로다.
남의 나라 땅에 무사히 살아 있으면서 오랫동안 돌아올 생각 않으니, 너는 일본서 스스로 의식이 족해, 짐짓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이냐, 아니면 중이 되어 바다 밖에서 온갖 번뇌를 잊고 편히 사니, 돌아오지 않는 것이냐!』)
부정은 이렇게 호된 꾸지람을 하고서도 다시 못 잊어 다음과 같이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아들 잃은 부정의 통곡>
-아비의 나이 58세요, 네 어미의 나이 또한 60이 됐음을 곰곰이 생각해 다오. 병란을 겪기는 했으나 가업엔 별로 손상을 입음이 없이 번창하고, 노비 또한 아직 여럿을 거느려, 남들은 모두들 네 집의 부귀를 부러워하는 터이다. 다만 여기 오직 한가지 부족함이 있다면 아들을 잃었음이로다. 네 나이도 이제 40이요, 또한 사물의 이치를 알만 할 것이니, 부모의 애끊는 상정을 안다면 한시 바삐 돌아와, 노부모의 여생을 돌봄이 효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어서 빨리 주인 대장군(가등청정) 앞에 고하고 또 네 대사님 앞에 말미를 청하여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헤아려 줍소사 빌거라. 배타고 바다 건너 아무 탈없이 돌아와 다시 밝은 해를 보고 부자가 한 곳에서 서로 만나 남은 생애를 함께 누릴 수 있다면 그 즐거움을 무엇에 비하겠느냐.
경신오월초칠일 부서천갑 즉아명, 이관명즉 서수희
-아버지의 피맺힌 편지 사연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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