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제5화 북해도 한인 위령탑의 엘레지 (1)|제2장 피맺힌 사연들의 흔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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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름다운 인상…북해도>
일본 본주의 최북단 「야쓰노헤」 (청삼현팔호시)를 떠난 국내선 여객기는 단숨에 「쓰가루」 (진경) 해협을 건네 뛰고 한시간만에 「삽보로」 (찰황) 구주 공항에 내려앉았다. 5월 중순이라는데도 기상에서 내려다본 광막한 「이시까리」 (석수) 평야 연봉들에는 아직도 잔설이 수북이 쌓여 눈이 부시다.
72년의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탓으로 이곳 북해도의 행정 수도 「삽보로」의 이름은 우리의 귀에도 제법 익어 있는 곳이다. 명치의 위신 정부가 북해도 개척의 것점으로서 본격적인 건설에 착수한 것이 1870년 (명치 2년)이라니까, 이 도시는 적어도 1백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현대적 수준으로 봐서도 놀랄 만큼 규모가 웅대하며, 잘 정돈된 도시미가 「이그조틱」한 감흥마저 돋운다.
동서남북으로 곧게 뻗은 노폭 1백m 이상의 대로들하며, 거기 무리 지어 심어놓은 「아카시아」·「라일락」·「포플러」등 가로수의 숲. 신·구 건물들이 서로 어울려 기막힌 조화를 이룬 「스카일라인」. 막 피어나기 시작한 「라일락」 꽃향기의 「터널」속을 거니는 시민들의 모습. 이 모든 것이 한데 얽혀 북해도의 첫인상은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

<5년 전에 위령비 세워>
그렇지만, 이런 감상에 젖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벌어졌던 우리 동포들의 피맺힌 사연들을 탐방하러 온 여행이라 우선 마음부터 도사려 먹기로 했다. 이 땅 도처에서 아직도 불을 뿜고있는 활화산들에 묻고, 또 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고요하기만 한 그 둘레 호수들의 정에 물어서라도, 그 당시 그 기막혔던 사연들의 자초지종을 알아내 원혼을 달래려는 것이 아닌가. 괴롭다면 괴롭고, 잔인하다면 잔인한 바쁜 여정이 시작됐다.
공항에 마중 나와준 사람은「삽보로」주재 대한민국 교육 문화 「센터」의 최학해 소장이다. 현지 근무 3년째가 된다는 최 소장은 이심전심으로 기자의 심경을 알아차린 듯 대뜸 차를 몰아 「삽보로」시 동북 교외에 있는 「한국인 순난자지 위령비」앞까지 데리고 갔다. 현재는 「삽보로」시민들의 소풍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는 이 일대는 「평화 공단」이라 불리는 곳. 그 한복판에 높이 3m 여의 대리석을 깎은 비문이 새겨진 것은 5년 전 (68년)의 일이라 한다.
당시 민단 북해도 지부장이요, 이곳의 거주 경력 30년이 넘는 남원유씨 (70)가 주동이 되고, 북해도 전 교포들이 성금을 갹출, 태평양전쟁 중 강제 징용으로 이곳에 끌려와 억울한 죽음을 당한 한인 동포들의 넋을 달래기로 한 것이다. 그 뒤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효상씨가 이곳에 들른 길에 화강암 석주로 비 주위에 둘레를 쳤으며, 최영해 소장이 손수 모국에서 가져온 12그루의 무궁화 꽃을 심었으나 현재는 겨우 4그루만이 뿌리를 붙이고 있을 뿐이다.
석비 정면에 「매직·펜」으로 큼직한 낙서를 한 철부지 일인 「장곡천」이란 자의 정체를 헤아릴 길이 없으나, 이미 유명을 달리한 고혼들 마저 이 얄궂은 심보의 일인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있구나 싶어 끓어 오르는 불쾌감을 털어 버릴 수 없었다. 한인들이 이 이역만리의 북녘 땅 북해도와 인연을 맺게된 역사는 저 구한말의 지사 김옥균의 처참한 망명 생활 말고서도 꽤 오래된다.

<김옥균의 망명 때 인연>
소위 일·한 합방 이후 날로 심해져 가던 일제의 수탈 정책에 견디지 못한 한인 동포들이 조국 땅을 버리고 남부여대하여 혹은 만주·「시베리아」로 또 혹은 일본 본토 내로 대이동을 시작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이래 이 광막한 미개척의 북해도 땅은 이들 한 많은 실향민들을 빨아들이는 얄궂은 운명의 땅이 돼가고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자의 마수가 중국 본토에까지 뻗치기 시작한 1935년께부터 패전으로 끝난 태평양전쟁 종말까지의 10년간, 이곳에 흘러 들어온 한인 노무자 수는 무려 72만명이나 되고, 그중 34만명은 이른바 「징용」이니 「정신대」니 하여 강제로 끌려온 인간 노예들이었다.
물론 그 이전인 소화 10년대에도 제발로 이곳에 건너와 막벌이 노동을 하던 한인의 수효도 자그마치 3만명을 넘었다.
북해도 땅과 한인 노무자들 사이에 얽힌 이 같은 원한에 사무친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명치시대 일본이 낳은 천재 시인 「이시까와·다꾸보꾸」 (석천탁목)에 의해 미리 예언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제 원흉들이 급기야 한반도 전체를 송두리째 삼켜버린 1910년, 이 고장 「하꼬다데」(함관)에 살고 있던 탁목은 장한식의 감회를 이렇게 읊었었다.
『지도위 조선국에 검고 또 검게
먹칠을 하노라면
으시시 가을 바람이 귓전을 스쳐가네…』
『동해의 한 작은 섬 백사장에
나 홀로 눈물 젖어
게 (해)들과 노닐고…. 』
조선이 독립을 잃고, 일제의 식민지로 굴러 떨어진 합방 조약의 조인이 공표 된 그 해 9월, 그는 재빨리 그 불길한 징조를 피부로 느끼면서 이 <9월 밤의 불행>이란 시를 지었던 것이다.

<시인 탁목 일가 무덤도>
가난과 불치의 병 (폐결핵)에 신음하면서도 천재다운 직관으로써 다가올 시대의 고뇌를 앞서 걱정하고, 27세의 청춘으로 요절한 시인 탁목의 예언은 불행히도 너무나 정확하게 적중했다.
지금 그의 일가의 무덤이 있는 「하꼬다데」시 남쪽 「다찌마찌미사끼」(입대갑)야말로 탁목의 예언을 가장 비극적으로 실증한 무대라는 것도 또한 역사의 큰「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꽃다운 나이의 한국 농촌 소녀들을 이른바 「정신대」라는 미명 아래 끌고 와 뭇 사내들의 수욕의 대상으로 삼게 함으로써 현대판 낙화암의 비애를 연출케 했던 곳이 바로 여기인 것이다. 이른바 『북해도 위안부들의 집단 투신 자살』 장소인 이곳에 우뚝 선 탁목의 시비를 보면서 역사의 「아이러니」에 눈물겨워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북태평양의 검은 파도가 넘나들면서 바위에 부딪쳐 포효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불과 20수년 전 이곳에서 벌어졌던 비극적 「엘레지」들을 이곳에 사는 교포 신필용옹 (62)은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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