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 취재도 대국 의존|유엔본부=김영희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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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본관리들이 한국문제 토의에 대한 우방들의 전략협의상황을 번번이 일본기자들에게「누설」시킨데서「유엔」주재한국대표부, 일본대표부와 양국 기자들간의 관계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우방이 마련한 남북한 동시가입, 「언커크」해체동의, 「유엔」군 철수반대를 담은 한국측 결의안의 윤곽은 일본대표부가 일본기자들에게 알려준 것이 일본신문에 보도되고 그것을 동경 주재 한국 특파원들이「중계」하는 과정을 거쳐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알려 왔는데도 우리측 대표부는「짜증」만 낼뿐「유엔」에서의 공보업무를 체계화시킬 생각을 않고 있다.
예컨대 지난21일 서독 등 5개국이「언커크」보고서의 공동제안국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소식도 일본관리의 입을 통해서 일본기자를 거쳐 한국기자들에게 전해졌는데….
이와 같이 하찮은 기사까지 통제하는 바람에 한심한 신세가 되는 것은 한국 기자들.
크고 작고간에 많은「뉴스」를 일본과 미국기자들에게 의존하다 보니 취재활동이란 바로 그들의 눈치 살피기를 의미하게끔 되었다.
이곳 대표부가 철저한 함구일변도로 버티는 까닭은 9월초 이곳 소식통이 우리측 결의안내용을 이미 일본신문들이 보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외무부의 사전 허락 없이 한국기자들에게「브리핑」했다가 호되게 기합을 받은 때문.
경위야 어쨌든 한국 문제처리의 우방의존에 겹쳐 기자들의「유엔」취재까지 미·일 등 대국 의존으로 굳어져 가니 한심한 노릇이다.
「그로미코」의 연설이 끝난 직후 본 특파원은「로비」의 길목을 지키다가 그와 즉석회견을 갖는데 성공했다.
『소련이 제창한「아시아」집단안보가 주한「유엔」군과 대치할 만한 한반도 평화유지 체제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로미코」는 질문의 의미를 찬찬히 새긴 다음 난처한 표정으로『지금은 피곤해서 대답하지 못하겠다』고 응수.
본 특파원이『간단하게 대답해도 좋다』고 집요하게 요구하자「그로미코」는 신중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한참 있다가『논평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소련외상과 한국인 기자의 최초의 회견은「질문과 답변의 회피」로 끝난 셈이다.
「유엔」총회에서의「그로미코」소련외상의 연설은 이번 총회의 가장 큰 쟁점인 남북한 동시가입문제나「유엔」군 철수문제에는 일제 언급하지 않아서「업저버」도 어리둥절한 표정.
「키신저」가 한국측의 동시가입안을 강력히 지지하고「오오히라」가「유엔」군의 평화유지역할을 높이 평가했으므로「그로미코」는 당연(?)히 그 반대 의사를 표명할 것으로 알았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것.
본 특파원은 마침「그로미코」를 수행한 고위외교 관리를「로비」에서 만나『북한이 섭섭해하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찔러 봤으나『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으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그로미코」는 또한「아시아」집단안보체제에 언급하면서『어떤 종류의 예외도 없이 모든 나라가 참가해야 한다』고 선언, 한국이 이에 참가할 자격이 있음을 명백히 시사했다.
이에 앞서 24일 있은「키신저」의「유엔」총회 연설은 국무장관으로서의 처녀 연설이자 그의「유엔」「데뷔」연설이기도 했다. 세계의 가장 어린 외상이라는 겸손한 자기소개로 연설을 시작한「키신저」는 ▲「유엔」의 평화유지 기능강화, 남북한 동시가입에 이어 ▲74년 중「유엔」주관 하의 세계식량회의소집과 ▲빈부국 격차 해소문제를 들고 나왔는데 이것은「유엔」안의 제3세계 회원국의 등장을 의식한데서 나은 호의적「제스처」인 듯했다. 식량회의 소집문제는 구체적 내용이 없이 단지 미국이 이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의사표시만 했다.
「키신저」의 연설이 끝나고 세 번째 연사로「페루」대표가 등단할 때는 장내는 텅 비고 그나마 남은 사람들도「키신저」와 악수하느라고 웅성거려「페루」대표의 연설은 허공에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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