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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교양] '문방청완(文房淸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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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문방청완(文房淸玩)/권도홍 지음, 청산, 10만원

"문방은 옛날 문인들이 책 읽던 생활공간인 서재다. 밝은 창, 깨끗한 책상(明窓淨) 아래 향을 피우고 차 끓이며 좋은 벼루와 명묵(名墨)을 비롯한 갖가지 문방구를 애완하는 일이 문방청완인데, 무릇 연장이 완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옛 문방구 뿐이다."

예스런 멋이 물씬한 책머리로 시작하는 '문방청완'은 한국의 옛 벼루.먹.붓.종이 등 문방 사우(四友)의 역사와 명품의 내력을 정리한 기록이다. 이 책이 진귀한 이유는 조선 시대 이래 이런 종류의 기록이 드물기 때문이다.

현존 기록으로는 다산 정약용의 아들 학연이 기록한 '문방첩'정도가 거론될 뿐이다. 서화가 구자무의 '한국문방제우시문보'(1994년)도 빼놓을 수 없으나, 이 책은 문방구의 아름다움을 찬탄한 역대 시 작품들의 모음집이다.

따라서 '문방청완'은 이 방면의 실증적 기록으로 유일한 셈인데, 이런 기록이 가능했던 것은 벼루 1백50점 등을 40년 가까이 컬렉션해온 저자의 내공 때문이다.

충남 보령의 성주산 등 벼루용 돌을 캐는 현지 답사 등 발품도 무시 못한다. 무엇보다 '서청연보'등 70여권의 한국.중국의 자료를 확인한 전거도 충실하다.

조선조 서화문화가 끝난지 1백여년 만에 선보인 이런 작업은 한국 서화문화의 빈칸을 메우는 주목할 만한 기록인 셈이다.

저자 권도홍(71)씨는 신문기자 출신. 75년 동아일보 해직 뒤 학원사 편집인을 거친 그가 문방사우 수집에 손을 댄 것은 1960년대 이후.

이 방면의 전문가인 문화재 전문위원 고 예용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정양모씨 등과 오랜 교유를 해왔고, 특히 벼루 컬렉션의 일인자로 꼽여왔다.

그러나 벼루는 문화재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온 '비운의 문방구'로 지목돼온 공예 장르다.

이 점은 문방사우에 끼지 못했던 연적이 특유의 단아한 조형미에 힘입어 국보 보물로 지정된 게 무려 10여점 가까운 것과 비교된다.

하지만 막상 적자(嫡子)인 벼루 중 문화재 지정은 추사 김정희가 사용했던 3점이 전부이나, 그것도 추사라는 이름 때문이었고 벼루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문화재의 사각지대다. 주요 컬렉터들인 간송 전형필 등의 관심도 벼루 등 문방사우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중 명품 중의 명품인 조선초기 '포도문일월연'(길이 30.5㎝)의 경우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포도잎 조각이 품격높은 돌(위원석)빛깔과 어우러져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 돌의 재료와 성질, 먹이 갈리는 정도, 발묵(潑墨.먹이 번지는 정도)에 대한 세세한 정보 때문에 이런 정보는 살아서 다가온다.

이웃 중국의 문방구에 관한 정보도 해동연(海東硯)으로 불려온 한국 벼루를 폭넓게 바라보게 만드는 참조항목이다.

저자는 유명한 벼룻돌 단계석을 캐는 고장인 광동성 고요현을 예로 들면서 그곳이야말로 당나라 이후 중국 서화문화를 뒷받침해온 역사적 장소로 규정한다.

천하의 좋은 먹을 욕심스럽게 수집해 묵치(墨癡.먹수집광)로 불렸던 시인 소동파가 남의 먹을 빼앗아 챙긴 일화 등도 흥미롭게 읽힌다. 하지만 너무도 뛰어난 먹은 감히 사용할 마음조차 먹기 힘든 법이다. 국내의 서예가인 고 검여(劍如) 유희강이 그런 경우다.

그에게는 청나라 건륭제가 사용했던 황제의 먹인 동림연사 어묵(御墨)한 점을 갖고 있었다. 유명한 먹 제작 장인(匠人)인 정군방의 아들 정사방이 만들었던 명품을 모델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검여는 이 먹이 아까운 나머지 단 한번만 갈아 사용했을 뿐 고이 보관해놓고 타계했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이렇게 탄식을 토해낸다. "사람이 먹을 갈지 않고, 먹이 사람을 가는구나 하고 탄식했던 소동파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1백33쪽)

책 뒤편 조선조 말 이왕가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한 먹 '행려도묵'등의 도판도 실려 있어 자료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아쉬움이 없지 않다. 그것은 읽어내기 만만치 않은 서술상의 불친철함 때문이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사대부들의 세계를 복원한 이 자료들을 보다 넓게 공유 못하는 아쉬움은 크다. 고가의 책 값도 유감스럽다.

그러나 실용적 가치를 따지지 않는 '연벽묵치(硯癖墨痴.벼루와 먹 수집광)' 권씨의 자비 출판으로 겨우 2백부만 찍었던 사정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귀한 책을 소화하기 어려운 한국 독서계의 빈약함, 전시대 문화에 대한 무심함부터 탓해야 할지 모른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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