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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주섭일 파리특파원 9일간의 견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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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바르샤바」체재 이틀째. 시가지를 마구 돌아다녀 본 후에야 「바르샤바」의 윤곽이 어렴풋하나마 시야에 들어왔다.
도시의 모든 중심지역 주위에는 노동자「아파트」군을 포함한 신주택지와 병원·공장 등의 건물이 운집해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담스」가족과 아침·저녁을 함께 했던 것은 시민생활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식생활은 아침과 저녁이 별다름 없는 소박한 것이었고 의류도 치장보다는 생활위주의 간편한 「원피스」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담스」부인은 「아파트」에서 약 5백m쯤 떨어진 방직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노동당수저택에만 적기>
주식은 감자 삶은 것과 빵뿐이고 우리 나라의 제육 같은 돼지고기 삶은 것 그리고 달걀은 삶아 으깬 것이 특별 「메뉴」로 나왔고 「토마토」와 사과 또는 복숭아를 식후에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날은 시내 「버스」를 타고 소련원조로 건설했다는 30층 짜리 「문화와 과학의 전당」, 「바르샤바」를 「나치」에게서 탈환했을 때 전사한 소련군 6만명의 공동묘지, 「폴란드 과학원, 지금은 국립도서관으로 쓰고있는 「크라신스키」궁, 「코페르니쿠스」의 기념탑. 「레닌」박물관, 「바르샤바」역사박물관, 「쇼펭」기념 박물관과 쇼펭 동상이 서 있는 야외음악당 등을 온종일 돌아보았다.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미술작품들 가운데 「모날디」(1730∼1798)가 제작한 남자의 나체석고상은 손에 「폴란드」특유의 긴 낫을 들고 등에는 지구를 무겁게 짊어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폴란드」가 「스웨덴」, 몽고족, 「나폴레옹」, 제정「러시아, 「나치」등으로부터 당한 수많은 시련을 압축해서 표현한 것 같았다.
13세기에서 18세기까지의 그림들은 「예수」의 수난사를 담은 종교화가 대부분으로 오늘날까지 이 민족에 깊이 뿌리 박혀있는 신앙을 엿볼 수 있었다.

<현 지도자 초상 볼 수 없어>
119세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그림들은 인간의 수난을 묘사한 것이 거의 전부였는데 전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그린 「크라브기크」(I921∼1969)의 『전투』, 시련을 극복하는 인간의 의지를 추상한 「초르체프스키」의 『고문』등의 작품은 이 나라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듯했다.
박물관 바로 옆의 현대식 7층 건물 옥상에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어 한 청년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이면서 『기에레크」라고 했다.
바로 「폴란드」의 현 지도자 「기에레크」노동당당수의 사무실 겸 저택이었다.
사실 「바르샤바」시가를 종횡무진 돌아다녀 봤지만 붉은 기가 걸려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었다.
그뿐인가. 이 나라 어느 곳에서도 현 지도자의 초상이나 동상을 보지 못했다.
동상하나쯤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레닌」박물관 앞에도 「레닌」의 동상은 없었다.
그렇다고 「바르샤바」에 동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공원과 광장에도 수많은 예술적인 동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화형 당했던 「코페르니쿠스」(1473∼1543), 「피아노」의 시인 쇼펭(1819∼1849), 독립영웅「코시우스크」(1786∼1817). 「쿼·바디스」의 작가 「셴켸비치」(1846∼1916), 「라듐」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은 「퀴리」부인(1867∼1934)등 내가 본 동상만도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는데 그 동상에는 이름·업적·출생 및 사망연대가 새겨져 있었다.
현 지도자의 동상을 세우지 않는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바르샤바」대학의 미학교수「마리아」여사에게 물어보았더니 『우리는 개인숭배를 가장 싫어한다』는 한마디로 설명했다.
「쇼펭」의 동상이 있는 야외음악당으로 가는 「택시」속에서 내게는 정말 「아찔한」일이 생겼다.
운전사가 어느 나라서 왔느냐고 묻기에 「코레안스키」라고 정직하게 대답했더니 「택시」가 「쇼펭」의 동상도 없고 음악당 같지도 않은 어느 건물 앞에 멈추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에게 지리에 익숙지 않으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니라는 말로 『니에』라고 하며 오른손으로 한 건물을 가리킨다. 『「코레아」 대사관』이라는 것이다. 순간 나는 「아차」싶어서 『「쇼펭」, 「쇼펭」』이라고 외치면서 어서 가자는 손짓을 하자 운전사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떠주었다.

<북한서 온 관광객들도>
다음날 상오 7시-.
어제의 당황했던 기억 때문일까. 「택시」를 타고서는 공연히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크라쿠프」와 「자코파네」를 일찌감치 다녀오기로 작정하고 중앙역으로 향했다. 여행자 「카드」를 꺼내어 두 도시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어 주고 다시「바르샤바」시내 지도를 펴서 역을 가리키자 그제서야 「택시」운전사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손때묻은 문을 열고 대합실에 들어선 순간 「홀」저쪽 구석에 동양인 7∼8명이 웅성거리고 있어 가슴이 섬뜩했다.
가만히 살펴보니까 2명은 일본관광객, 3명은 모택동 복장의 중공인, 나머지는 아무래도 북한에서 온 것 같았다. 머리를 바싹 치켜 깎은 데다 옅은 회색양복차림을 한 것, 그리고 알맞게 촌티(?)를 흘리는 분위기 등으로 봐서 북한에서 온 사람에 틀림없다고 믿어졌다.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다. 역을 빠져나와 「택시」를 탔다.
기왕 「바르샤바」에 머무를 바에야 시내를 어정거리느니 「폴란드」의 「레테르」격인 「쇼펭」의 유적이나 찾기로 했다.
「쇼펭」생가가 있는 「제라조바·볼라」까지의 52㎞를 달리면서 운전사는 몇 개의 「쇼펭」곡을 휘파람으로 연주했다. 아마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세계공통의 언어」로 「서비스」하는 것이리라.
길 양편은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대평원-. 띄엄띄엄 숲이 흩어져있고 그 숲을 배경으로 농가가 점 찍혀있다.
마치 원근법을 가르치기 위한 그림처럼 길과 가로수는 평원 저편에서 자그마한 점으로 엉켜지고 그 위를 가끔 생각난 듯이 마차가 지나가다.

<쇼펭 생가에 관광객 붐벼>
상오9시인데도 「쇼펭」의 생가 앞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었다.
5개 「그룹」의 단체관광객이 몰려들었는데 그중 2개가 소련에서, 나머지는 동독·「체코」·「폴란드」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야폰스키」(일본사람이다)
입장권을 사려는데 누군가 등뒤에서 이렇게 말한다.
돌아보니까 「폴란드」의 국민학교학생들이 장난감 같은 「카메라」로 「일본인」모습을 담다가 얼른 「카메라」를 감춘다. 아마 그들은 집에 돌아가면 「폴란드」에 처음 들어온 한국인 신문기자의 사진을 놓고 『「야폰스키」가 이렇게 생겼더라』고 얘기하리라. 「쇼펭」생가는 입구에서 약2백m의 숲길을 더듬어간 곳에 있었다. 담쟁이덩굴이 지붕까지 기어오른 자그마한 초가였다.
18∼19세 정도로 보이는 예쁜 안내양이 방긋이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소련관광객 틈에 끼여 기나긴 설명에 귀를 기울였지만 단군의 자손이 「이반」의 후예가 하는 얘기를 무슨 수로 알아들으랴.
설명 중간에 「차이코프스키」라는 말이 수십 번 나왔지만 「쇼펭」이 「차이코프스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소리인지, 「폴란드」의「쇼펭」이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와 비슷한 위치라는 소리인지조차도 구별 할 수가 없다.
악성이 태어났다는 방, 그가 어렸을 때 연습했다는 풍금 등을 둘러보고 나니 더이상 할 일이 없다. 「카페」에서 빵 몇 조각을 삼키고 「코피」를 마시면서 아무리 궁리해봐도 말이 안 통하니 도리가 없다.
「버스」편으로 「바르샤바」에 돌아와 내킨 김에 「쇼펭」유적답사에 올랐다.
「쇼펭」이 7살 때까지 살았던「크라코스키」가의 3층 건물은 「바르샤바」대학화학실험실로 둔갑해 있었다.
건물 앞에 「천재 「쇼펭」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란 쇠 간판이 없다면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르샤바」대학시절 그가 일요일마다 풍금을 켰고 「그라코프스카」양과의 첫사랑을 불태웠던 성모「마리아」교회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고있었다.

<쇼펭의 조국애 되새기고>
「쇼펭」의 유적에는 어김없이 「무엇무엇을 하던 곳」, 혹은 「언제 살던 곳」이란 쇠 간판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쇠 가판은 1831년에서 끝났다.
「러시아」의 「폴란드」분할에 반대, 반「러시아」 투쟁을 벌이다가 「파리」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그의 조국애는 「폴란드」를 생각하며 작곡한 수많은 「폴로네이즈」로도 엿볼 수 있지만 그가 숨을 거둘 때 남긴 유언은 특히 절절한 것이다.
시신을 전부 조국의 흙에 묻을 수 없다면 「심장만이라도」 「바르샤바」의 하늘아래 묻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바르샤바」성 십자교회의 한 기둥아래 묻어졌다.
이 교회는 2차 대전 때 「나치」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쇼펭」의 심장을 묻었던 기둥만은 깨끗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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