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低보다 원高가 문제 … 경상수지 흑자 덫 걸린 원화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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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양적완화 2년 넘길 수도” -1일 언론 인터뷰에서 “엔화 약세 과도하지 않다” -지난해 11월, 의회에서 ▶현오석 경제부총리 “환율에 일희일비 안 돼” -3일, 범금융기관 신년 인사회 “엔저, 예상했던 부분”-2일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양적완화 정책이 2년을 넘길 수도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BOJ) 총재가 새해 벽두부터 시장에 선제 펀치를 날렸다. 물가상승률이 2%에 이를 때까지 무한정 돈을 풀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출구전략 논의는 아직 이르다”거나 “추가 통화정책의 여지가 있다”는 지난해 발언과는 차원이 달랐다. 외환시장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새해 첫 장이 열리자마자 엔화는 달러당 105.4엔으로 고꾸라졌다. 장중가였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였다.

구로다의 모습은 마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약 3조 달러를 퍼부은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을 떠올렸다. ‘Fed는 달러 발권력으로 디플레이션까지 물리칠 수 있다’는 이른바 ‘버냉키 독트린’의 일본 버전이다. 엔저는 일본의 수입물가를 끌어올려 디플레이션을 막는 효과가 있다. 여기다 일본 수출기업엔 가격 경쟁력이란 보너스까지 안긴다. 극우보수의 길을 걷고 있는 아베 정부로선 ‘일석이조(一石二鳥)’의 묘수다.

중국의 환율 조작에 대해선 늘 발끈해 온 미국도 일본의 노골적인 엔저 드라이브엔 묵묵부답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고육책이지만 Fed가 지난해 말 양적완화 규모 축소에 착수한 이상 엔화 가치 하락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기도 하다. 미국이 돈줄 죄기에 나서면 달러 값은 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최근 미국의 경기회복 속도는 시장 예상보다 빨라지고 있다. 이 추세가 지속된다면 양적완화 축소에도 가속도가 붙어 엔저 기울기는 지금보다 더 가팔라질 공산이 크다.

세계적인 달러 강세를 역행한 원화 강세
문제는 엔화가 아니라 원화다. 미국이 돈줄 죄기에 착수했다면 달러는 강세가 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지난해 이후 원화가 되레 강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11월까지 22개월 연속 흑자를 기록한 경상수지가 원화 값을 밀어올린 원동력이다. 사상 최고의 외환보유액에 안정적인 경제, 미국보다 높은 정책금리도 해외 달러를 유혹하고 있다. 한국투자증권 전민규 이코노미스트는 “외채 부담이 큰 신흥국 통화가 약세를 보이면 원화의 상대적 매력이 더 부각될 것”이라며 “미국 출구전략이 상당 부분 진행되는 하반기께엔 원화가 달러당 1000원대 초반을 기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기에다 최근 엔화 가치는 과거 세 차례 엔저 때보다 더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엔화 가치는 2012년 9월 달러당 78.2엔에서 지난해 12월 103.5엔으로 무려 24.4% 절하됐다. 1988년 5월부터 90년 5월까지 진행된 1차 엔저 당시에는 엔화가 달러당 124.8엔에서 153.5엔으로 18.7% 절하하는 데 그쳤다. 국제사회의 엔저 유도를 위한 ‘역플라자 합의’로 95년 6월부터 96년 7월까지 진행된 2차 엔저 때는 22.8%(84.5엔→109.4엔) 절하됐다. 2004년 12월부터 2007년 6월까지 일본 당국의 외환시장 개입으로 시작된 3차 엔저 때도 하락률은 15.3%(103.8엔→122.6엔)에 그쳤다. 이러다 보니 원-엔 환율 하락 속도는 훨씬 더 가팔라질 수밖에 없다.
 
손 쓸 명분 없는 외환당국
그러나 한국 외환당국으로선 이 같은 원-엔 환율 급락에 속수무책이다.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 폭이 예상치를 크게 뛰어넘는 700억 달러대로 예상되는 등 엔저의 후유증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수출 호조세 속에서 돈을 풀거나 달러를 사들이는 식의 통화정책을 시도한다면 선진국의 견제가 심해질 것”이라며 “수출 실적에 적신호가 켜지고 나서야 정부가 움직일 명분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한 고위 경제 관료는 “외환당국자가 ‘주시하고 있다’는 등 구두 개입성 발언을 해도 실제로 동원할 수단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시장이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싼 원화는 더더욱 비싸지는데(高益高) 약한 엔화는 더 약해지는(低益低) 만큼 원-엔 환율 그래프는 또 한차례 꺾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화투자증권, 현대증권 등 대다수 증권사는 올해 원-엔 환율이 900원대에서 안착할 걸로 내다봤다. 민경섭 현대증권 연구원은 “이제 100엔당 900원대 환율에 익숙해져야 한다”면서도 “지난해 100엔당 원화가치가 230원이나 올랐는데도 우리 경제가 큰 충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지나친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증시도 충격을 피하긴 어렵다. 새해 벽두부터 코스피 지수가 급락한 것처럼 상반기 내내 수출주가 부담을 받을 거란 분석이다. 김지성 노무라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원·엔 환율이 960원대까지 내려앉을 걸로 전망되는 만큼 코스피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며 “다만 하반기에는 글로벌 경기 회복세가 부각되면서 주가가 반등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미진 기자 mi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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