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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원 짜리 인생과 에밀레 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불국사 경내에 들어서자 막내 딸년이 환성을 질렀다.
『야아, 10원 짜리 탑이다)딸년은 10원짜리에 정을 두고 살아온 몸이다. 암만 물가가 올라도 10원에 웃고 10원에 우는 딸년은 10원 짜리 인생인 셈이다. 이런 딸년이 그 10원짜리의 진짜 다보탑을 보고 감격해 버린 것이다.
시내로 돌아와 박물관에 들어갔더니 이번엔 목이 잘린 불상들을 보고 놀란 모양이다.『아빠 누가 저렇게 했어?』『임금님이 그랬다.』 『왜 그랬어?』 『부처님을 미워해서.』『어머! 나쁜 임금님도 있나?』불교를 탄압한 임금님만 나쁜 것은 아니다 .불교를 일으키고 신종을 만든 임금님들도 나빴었다. 이번에도 나는 종을 보며 그 생각을 했다. 「에밀레」의 전설이 실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진실의 증언이 있다. 선왕의 명복을 빈다는 동기도 좋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목적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백성을 착취하고 죄 없는 어린 생명마저도 마음대로 끓는 쇳물 속에 처넣을 수 있는 절대권력을 지녔던 것이 당시의 군주다.
신라가 아무리 번영했었다 하더라도 발굴되는 능마다에서 지금도 그렇게 쏟아져 나오는 찬란한 황금문화는 바로 그 같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백성들의 피눈물의 대가로 이루어진 군주문화.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인신공희의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다 해도 그 애절한 종소리에서 먼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신종은 아름답다. 이것은 한국문화의 자랑이 아니라 세계인류문화의 자랑이다. 세계에 이보다 더 으뜸가는 종은 없다. 그 전체적 조형미와 문양의 예술적 가치는 세계의 어느 종도 따르지 못한다. 용일·상하대·유곽·당좌·비천 등 우주상이 지닌 문양의 섬세한 기교와 전체적 구성과 구연부의 팔능곡선 등이 지닌 아름다움은 딴 어떠한 종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또 한국범종의 특색인 포통은 이 신종으로 하여금 더욱 신비한 소리를 사방 팔백리로 은은히 울려 퍼지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종을 대할 때마다 나는 희비가 엇갈리는 혼돈 속에 빠지고 만다. 그렇게도 아름다운 예술이 그렇게도 참혹한 제물의 대가로 완성되다니….
그러나 그 종소리가 영원한 시간과 공간 속에 울려 퍼지며 인생의 허망을 일러주듯이 지금은 그 임금님도 사라지고 그 백성들도 사라졌다.
결국 억울한 사람이나, 억울하게 만든 사람이나, 모든 인간은 시간의 흐름 앞에서 패배하고 마지막 승리의 이삭은 예술만이 거둬들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린 딸년에게 장차 내 그림 도구를 물려주고 내가 못 그린 명화를 그리게 해 주고 싶다. 어차피 누구나 지닌 10원짜리 인생 값으로 그것을 인상하도록. 김우종(경희대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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