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2)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5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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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천대받은 나날>
6·25때 김일성의 전권위원으로 서울에 온 이승엽은 정태식과 나를 해방일보에서 쫓아내려고 별렀다.
하루는 중앙당 서울 연락소에 가니 해방일보 사원 중에 30세 이하의 남노당원을 전부 의용군으로 지원시켜 전선으로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은 안 된다고 처음으로 지시에 항거하였다.
그 사람들은 지하에서 고생 끝에 쉴 사이도 없이 약 한 첩도 못 먹고 건강을 제대로 회복도 못하고 있는 터에 어떻게 전선에 내보낸단 말이냐, 전선에 내보내려면 나부터 먼저 내보내달라고 버티었으나 당 지시를 그대로 집행하라고 우겨대는 것이었다. 나는 회사공장에 돌아와서 신문사의 공장직원들을 앞에 모아놓고 울면서 사정이야기를 하였었다.
오랜 영어생활에서 머리털이 앙상하게 빠지고 피부병으로 썩어 들어가는 해골같이 되어있는 노동자들을 또 전선에 나가서 죽으라 하니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김일성은 벌써 젊은 남로당원들을 전선에 내몰아 다 없애버릴 계획이었던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정태식은 논설위원을 해임 당하여 정권처분을 당하고, 나는 이유도 없이 감봉처분을 당하게 되었었다.
이러한 쓰라린 환경 중에서도 한가지 위안되는 일이 있었다.
정태식과 내가 말할 수 없는 신세를 진 채항석을 중앙당 서울 연락소에 와있던 중앙당 간부부 부부장 이범순에게 말하여 조선은행 (한국은행) 부총재로 임명되도록 한 것이었다. 때마침 평양 재정성 부장(차관)인 윤형식(전 노력인민편집국장)이 서울에 와서 조선은행 총재를 겸하고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범순이라는 사람과 만났다는 것이다.
이범순은 이제순 이효순 등 삼형제의 맨 끝 아우이다. 그들 3형제는 함북출신이며 장형 이제순은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한 사람이었다. 그 뒤 국내에 들어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5년 해방되던 해의 봄에 옥사하였다.
둘째형(이효순)은 한 때 북한 노동당의 부위원장 겸 연락부장으로 있다가 숙청 당한 바로 그 이효순이다. 이효순은 한 때 재력이 당당하였으나 67년 박금철과 함께 갑산 지하 공작파로 김일성한데 쫓겨난 것이다. 이유는 중앙당 연락국장으로서 대남 공작을 그르쳐 놓았고 김일성의 사상과 불일치하는 점이 많아 당 정치노선에 항상 불만이었다는 점으로 숙청됐다.
그의 동생 이범순과 나는 처음 만날 때부터 서로 의기투합하여 친하여졌었다. 그는 나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여 주었었다. 중앙당 서울 연락소는 지금 서울고교 자리에 있었다. 그는 나에게 조금이라도 영양분 있는 음식을 먹이려고 늘 식사 때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자기가 먹는 최고급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었다.
그 당시 이범순은 서울에서 이승엽에 다음가는 실권을 쥐고 있었다. 밤에는 삼청동 산 위에 있는 특별 숙사에서 같이 술을 마시며 늦게까지 이야기 한 일도 있었다. 삼청동 특별 숙사라는 것은 평양에서 오는 상급 (장관급)이 유숙하는 곳으로 거기는 고급음식 뿐만 아니라 소련서 가지고온 고급 음식물을 마음대로 먹게되어 있었다. 그 자리가 아마 그때의 국회의장의 공관자리인 듯 싶다.
이범순은 이승엽과 나의 사이가 나쁜 것을 알고 있으며 이승엽 때문에 내가 억압받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채용하여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여 주었다. 그는 나를 자기 같은 중앙당 간부부 부부장을 시키려 하였다. 간부부는 제일 가는 실권을 행사하는 부다. 부부장이 2명인데 그때 일석이 결원 중이었다.
그것은 내가 당시 남로당간부들을 제일 많이 알고 있을 뿐아니라 당원 재등록을 할 때 내가 최후까지 체포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수백 명을 보증하며 재등록을 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로당원을 고급간부로 등용하자면 전권위원인 이승엽의 비준이 필요하였었다. 나를 간부부 부부장으로 동용하는 데 이승엽이 비준해줄 까가 의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김일성의 비준을 얻으면 이승엽이 거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자신이 직접 추천하여 나의 서류를 평양에 보냈던 것이었다. 그런데 회부되어온 서류를 보니 나의 출신성분이 지주라는 데와 일본 조도전 대학 졸업의 「인텔리」이고 또 남한출신이라고 해서 각하해 버렸다.
서류에는 붉은 「언더라인」을 치고 결국 비준이 통과되지 않았다는 통지를 해온 것이다. 이승엽이가 비준을 거부하기 전에 평양의 북로당 측에서도 비준을 거부하여 왔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범순의 호의가 성공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새옹지마란 용어가 여기에도 또 적용될는지 모르지만 내가 북로당 간부가 되지 앓은 채 바로 오늘날 자유의 품에 안겨 살아남은 길이 된 것이다. <계속><제자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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