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힘에 굴복한 고정금리 대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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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한때 은행 가계대출 시장에 몰아쳤던 고정금리 열풍이 온데간데없다. 고정금리 대출을 키우려던 정부 정책이 시장의 힘을 거스르지 못해서다. 장기 고정금리로 대출을 받아놓은 소비자들만 속이 탄다.

 한국은행 최근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새로 나간 가계대출 중 고작 14.3%만 고정금리 대출이었다. 1년 전인 2012년 11월 절반(50.5%)에서 급속히 쪼그라들었다. 금융당국이 “고정금리 대출 비중을 5년 내 6배로 늘리겠다”며 ‘가계부채 연착륙 종합대책’을 발표한 게 2011년 6월 말. 지난해 11월의 14.3%는 대책 발표 직후(2011년 7월)의 고정금리 대출 비중과 소수점 아래까지 똑같은 수치다. 2년 반 만에 도로 제자리다. 그동안 금융당국의 안간힘이 무색하다.

 고정금리 대출이 외면받는 이유는 비싸서다. 현재 고정금리 주택담보대출은 연 이자율이 4.3~4.8%(적격대출 기준)로, 3%대 중후반인 변동금리보다 0.5%포인트 이상 높다. 처음부터 금리 차이가 컸던 건 아니다. 1~2년 전만 해도 은행들은 이자율을 변동금리 수준으로 낮춘 고정금리 대출 신상품을 앞다퉈 내놨다. 정부가 고정금리 비중을 크게 늘리라며 은행별로 목표치를 주고 압박해서다. “고정금리 대출이 안정적” “금리 상승기엔 고정금리가 유리하다”며 마케팅에도 열 올렸다. 앞으로 금리가 오른다는 말에 대출자는 고정금리에 몰렸다.

 그런데 시장이 달라졌다. 지난해 4월부터 국고채(5년물) 금리가 꾸준히 상승하자(2.63→3.24%) 고정금리 대출금리가 따라 올랐다. 반면 변동금리의 기준이 되는 코픽스(COFIX) 금리는 1년 새 3.01%에서 2.6%로 뚝 떨어졌다(신규 취급액 코픽스 기준). 시중은행 개인여신 담당자는 “과거엔 목표치에 맞추려고 역마진까지 감수하며 고정금리 대출을 늘렸지만, 지금은 국고채와 코픽스 금리 차이가 워낙 커 도저히 고정금리 대출을 싸게 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해진 목표치를 이미 어느 정도 채워놔 은행으로선 굳이 고정금리 대출을 늘리려 힘쓸 필요가 없기도 하다.

 답답한 건 기존 고정금리 대출자들이다. 직장인 조모(35)씨는 2년 전 아파트를 담보로 1억5000만원을 대출받았다. 15년 만기, 연 5.1%짜리 고정금리 상품이었다. 그때만 해도 5% 정도면 꽤 낮은 금리라고 여겼다. 시중금리가 오를 테니 금리를 묶어놓는 게 이익이란 계산도 있었다. 정부도, 은행도 고정금리 대출이 안정적이어서 좋다던 때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초저금리 시대엔 5%대 금리는 높아도 너무 높다. 연 4% 안팎인 변동금리 대출자에 비하면 연 100만원 넘는 이자를 손해 보는 셈이다. 조씨는 “조기상환수수료 150만원을 물더라도 지금이라도 변동금리로 바꾸는 게 낫겠다”며 대출 갈아타기를 준비 중이다.

 은행권에선 2년 반 전 금융당국이 시장을 거꾸로 읽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은행 관계자는 “당시 정부는 이렇게까지 금리가 더 떨어질 줄 전혀 모르고 가계부채 대책을 내놨던 것”이라고 말했다. 기준금리를 결정할 권한이 없는 정부로선 금리 예측이 어긋나도 손쓸 도리가 없었다.

 금융당국은 여전히 ‘고정금리 대출 확대’ 방향이 장기적으론 옳다는 입장이다. 조성민 금융감독원 가계신용분석팀장은 “변동금리 대출 비중이 지나치게 높으면 금리가 오를 때 충격이 크기 때문에 가계대출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며 “앞으로의 금리방향을 알기 어렵지만 고정금리 대출을 늘리는 정책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조 팀장은 “대출기간이 짧다면 지금은 소비자 입장에서 변동금리 대출이 좀 더 나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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