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캉스」유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바캉스」란 말이 유행한지 몇 해된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덧 여름철 행사가 되고 말았다. 내가 가족과 더불어 이 「바캉스」를 즐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무던히도 늦은 셈이다. 포항으로 떠난 고속버스가 서울을 벗어날 무렵 운전사 앞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금렵을 강화한 뒤 부쩍 늘어난 야조와의 충돌이기를 바랐지만 그런 목가적 사고는 아니었다.
목적지에 들어서면서 불을 뿜는 연돌이 보이는데 이곳이 포항종합제철이다. 그곳 P소장과의 정담을 나누기도 바쁘게 2백32만평에 깔려있는 쇠 공장을 둘러보았다. 용광로 속에서 타고 있는 쇠의 불길은 태양표면과 같은 정열이 「렌즈」를 통해서 망막에 인화된다. 용광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쇳물은 진흥 빛 액체. 뿜어대는 물줄기와의 대결에 지쳐 커다란 쇳덩이가 되고 만다.
자동차편으로 이곳을 돌아보는데 2시간이 소요됐지만 겨레의 심장이 고동치는 듯하다. 바닷물에 잠겨있으면서도 망막에서 쇳물이 되살아난다.
이튿날 오전은 보경사를 지나 십이 폭포를 둘러봤다. 비가 온 뒤여서 내연산의 절경이 돋보인다. 더욱 서울사람들의 발자취가 별로 미치지 않는 탓인지 소박한 풍취가 남아있었고 소나무를 함빡 안고있는 내연산의 경치가 나산만 보아온 눈에는 오히려 신기롭게 여겨졌다.
다음날은 경주를 찾았다. 29년 전의 이곳을 회상할 때 너무나 실망이 컸다. 마치 동양화 바탕에 유화 물감으로 칠한 것처럼 볼품없이 변해버린 이 고장이 아깝다. 이튿날 아침 일찍 포항을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충무에서 1박. 거제도와의 해협에는 대규모의 굴 양식장이 있고 그사이를 기선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가지만 자연을 상하지 않아서 아름답다.
충무공에 얽힌 전설과 사실들이 충무시를 아담한 항구도시로 남겨두었던가. 돈을 내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는 절이 이곳에는 남아있다. 포근한 하룻밤이려니 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피로에 지쳐있지만 잠들 수가 없다. 서울의 무슨 외과대학생들이라던가. 이 근방 벽촌인지 어촌을 둘러온 의료봉사단이란다. 「팝송」인지 유행가인지 하는 것이 남녀혼성으로 여관을 진동하니 나만 알고 남을 모르는 젊은 세대의 윤리가 안타깝다. 한려수도는 잔잔한 자연 그대로다. 바다에 깔려있는 섬 사이를 누비며 지나가는 풍경에 도취되니 지루하지 않다. 그런데 삼천포에 정박중인 일본어선이 감정을 자극한다.
거제와 남해의 두 섬이 다리로 육지와 이어있으니 세상은 달라지고 있다. 여수에서 1박. 오동도의 동백군락과 곳곳에 섞여있는 죽림은 천하일품이다. 동백군락은 남해안에만 있는 특유한 것이요, 죽림 또한 중부 이북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이다.
서울행 풍년호. 순천에서 여자대학생이 요란하게 몰려들더니 「코러스」가 「기타」반주에 맞춰져 떠들썩하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차안을 돌아다니는 모습도 아름다울 수 없다. 이들도 무슨 봉사활동에서 돌아오는 길이라는데. 이렇게도 많은 대학생들이 땀흘리며 일하고 있다는데 이런 모습만이 눈에 띄는지 모르겠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노수의 그늘에 모여있는 촌옹들이나 하동들의 「바캉스」가 부럽기만 하다. 아무런 풍속공해도 없으니 말이다. <박상윤(성균관대 교수·생물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