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문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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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말복이 지났다.
입추는 더 먼저 지났다.
그러나 무더위는 아직도 가시지 않고 대낮엔 뙤약볕이 불만 같다.
올해엔 초복에 앞서 복더위가 시작되었고, 말복이 지나도 복더위가 꺾일 줄을 모르고 있다. 복중의 더위도 유난스럽기만 했다. 30도를 넘는 폭서가 7월 한 달의 반 이상을 지속, 녹여버린 도시들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학교는 방학을 앞당기고 1천만명을 헤아리게 될 피서인파가 바다와 산으로 몰려갔다고 한다.
장마조차 피해 달아난 올 여름엔 특히 남도지방에선 무더위에 더하여 논과 우물과 사람의 목이 가뭄에 타는 연옥과 같은 고초조차 겪어야 했다. 참으로 진절머리가 나는 여름이었다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제 말복이 지나고 입추가 지나갔다.
한 겨울 속에 입춘을 기록하고 한 여름 속에 입추를 기록한다는 것은 무슨 영문에서일까.
그건, 겨울에 지쳐 봄을 기다리기에도 지친 사람들의, 또 여름에 지쳐 가을을 기다리기에도 지친 사람들의 이지러져가려는 마음을 끝까지 잡아주자는 그런 달램인가. 마치 봄이 저만큼 와 있다오, 가을이 저만큼 와 있다오 하고 외치듯이.
그러고 보면, 엄동설한에 입춘을 점하고 삼복 더위 속에 입추를 정해두었다는 것은 우리네 옛사람들의 동양적인 슬기인지도 모른다.
오늘에 지치고 내일을 기다리기에도 지쳐버리는 일이 어찌 겨울의 추위며 여름의 더위와 같은 자연의 시련뿐이겠는가. 세상만사가 모두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하는 시련의 영원회귀임에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고개를 그대로 파묻고 있으면 좀처럼 헤어나갈 내일이 없어 보이는 오늘의 시련 속에서도 끝내 희망을 버리지 말고, 그래도 고개를 세워 저만큼 와있는 내일을 다짐해 보라는 교훈, 이것이 바로 겨울 속의 입춘, 여름 속의 입추의 엄숙한 가르침인 것이다.
하지만, 복더위 속에서 말복을 보고, 절정에 서서 조락을 보고, 한 고비 위에서 내리막길을 미리 짐작하는 슬기와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득의의 정상에 버티고 있는 자에게나 실의의 심연에서 짓눌려 있는 자에게나 다 같이 이 한고비는 지나가고야 만다는 것을 춘하추동 천지의 움직임의 섭리는 고루 가르쳐 주고 있다. 모든 것이 돌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라면, 절정에 있다해서 교오함도 어리석은 것이요, 심연에 있다해서 비굴해함도 의젓잖은 일이다.
겨울을 견딘다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라 함은 동토 속에서 눈을 트는 보리이삭을 보면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여름을 견딘다는 것 또한 헛된 일이 아니라 함은 이제 목전에 다다른 가을의 결실을 보고 알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시련은 햇빛인양, 꿋꿋하게 이마로 받는 사람은 시원한 바람이 이는 내일이 오면 자기의 어느 구석엔가 반드시 「오린지」의 살결처럼 여무는 내실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내일은 반드시 온다. 아니 그 내일은 이미 저만큼 와 있는 것이다.
복더위 속에 말복을 보내고 이제 결실의 가을을 맞이할 마음의 채비를 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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