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 특파원의 바그다드 르포] 시내 곳곳 참호 … 학교선 화생방훈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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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이라크의 입'이 쓰러졌다. 이라크의 외교정책을 총지휘해온 타리크 아지즈 부총리가 12일 아침 누적된 피로로 몸살 증세를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에 이어 이라크 권력 서열 2위인 타하 야신 라마단 부통령도 이날 소집된 비상안보회의를 이유로 자리를 비웠다.

이에 따라 이날 두 사람을 만나려던 한국 국회의원단과 프랑스 사절단은 국회의장 및 장.차관들을 접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날 바그다드 시내에 있는 10여곳의 정부청사 정문 앞에는 모래 부대로 된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사람키 높이만한 기역자 모양의 참호도 곳곳에 파였다. "이틀 전 유엔의 철수 지시가 떨어진 직후 군인들이 서둘러 참호를 팠다"고 한 시민은 전했다.

수십만점의 문화재를 소장한 바그다드 국립박물관도 이날 보수공사를 이유로 문을 닫았다. 박물관 건너편 만수르 시장의 한 상인은 "봄철을 맞은 통상적인 보수공사라고 하지만 실은 공습에 대비해 소장품들을 비밀창고로 옮기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바그다드 시내 각급 학교에서는 사이렌이 울리면 머리를 두손으로 감싸쥐고 책상 밑에 숨는 '화생방훈련'이 일제히 실시됐다.

바그다드에 남은 외신기자들은 CNN 등 미국 매체 기자들이 묵는 숙소로 자리를 옮기느라 분주했다. 알 라시드 호텔 앞에서 만난 한 중국 기자는 "미국 기자들이 있는 팔레스타인 호텔로 옮기는 중"이라며 "이라크인 가이드가 '그곳에 가면 미군의 공습을 피할 수 있다'고 귀띔해줬다"고 말했다.

이날 만수르 거리에 있는 바그다드 민속박물관에 견학온 초등학생 어린이 3백여명은 박물관을 방문한 한국 의원단을 보자 이들 앞에 질서정연하게 줄을 섰다. 그리고 "위 러브 사담 후세인!"을 외치며 브이자를 그려보였다.

11일 밤 바그다드 젊은이들에게 인기높은 알아사트 거리의 한 피자집에서 의원단과 조우한 회사원 만지(29)는 "미국은 결코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왜냐고? 그것은 우리 이라크인들의 가슴 속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우리를 얕봤다간 큰 코 다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낮 의원단과 면담한 이라크 국회 외교위원장 알하무디도 "미군은 처음엔 공화국 수비대원, 다음엔 바트당 당원, 최후엔 이라크 국민 전부와 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메드 아시드 알라위 국회 부의장도 "전쟁이 나면 이라크인들은 쿠르드족, 시아파 국민들과 똘똘 뭉쳐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에게 "미국의 개전 명분에 설득력이 없다는 데 동의하지만 후세인이 독재자라는 주장은 맞는 것 아니냐"는 질문은 우문 중 우문이었다.

"그는 독재자가 아니다. 지난해 10월 실시된 자유선거에서 이라크 국민의 1백% 지지로 선출된 합법적인 지도자다. 이라크인들은 그를 중심으로 단결해 이 난국을 극복할 것이다."

60대인 알라위 국회 부의장부터 20대인 회사원 만지까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이어지는 똑같은 대답이었다.

바그다드=강찬호 기자

<사진 설명 전문>
이라크를 방문 중인 한국의 여야 국회의원단이 12일 바그다드 시내 만수르 거리에 있는 민속박물관 앞에서 박물관 견학을 온 이라크 초등학생들과 포즈를 취했다. 아이들은 "위 러브 사담 후세인!"을 외치며 V자를 그려보이고 있다. [바그다드= 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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