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산불] 불 끄러 갔던 소방차까지 불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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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사에서 화재진압을 하던 소방차가 갑자기 몰아친 강풍으로 불이 옮겨 붙어 소방관이 긴급대피하는 상황이 발생했다.[연합]

5일 오후 3시 낙산사 앞 7번 국도 주변 산은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검은 연기로 가득 찼다. 연기 사이로 드문드문 시뻘건 불길이 치솟는 가운데 인근 주민들이 탁한 기침을 내뱉으며 연기 속을 뚫고 경찰 통제선 밖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10시20분쯤 잡힌 불길이 또다시 불어닥친 강한 바람에 되살아난 것. 일대는 순식간에 산림청과 양양군 소속 소방 헬기들의 굉음과 소방차들의 사이렌 소리로 뒤덮였다. 옆 사람의 고함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서있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강풍에 불씨는 몇 km씩을 날아가 4일 발화지점인 물갑리.화일리를 다시 덮치고 동북쪽으로 2km 이상 떨어진 정암리를 맹렬히 태웠다. 인근 군부대에 추가로 파견되는 군병력이 속속 현장에 도착했으며 수백 대의 군경 트럭과 버스가 가득 찬 양양읍 일대는 마치 계엄상황을 방불케 했다.

양양군청 이상부(52) 산림보호담당은 "몸도 가누기 힘든 초속 20m 이상의 바람을 타고 활화산처럼 치솟는 불기둥을 보고 순간 '이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순식간에 수백m씩 불똥이 튀며 이산 저산으로 불길이 옮겨 붙는데 자칫하다가는 진화대원 모두 불길에 갇혀 죽을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양양읍 거마리 김광영(52) 이장은 "5일 0시20분쯤 2㎞쯤 떨어진 산에서 불기둥과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고 여기저기서 불똥이 허공을 휙휙 날아다니는 것을 봤다"며 "잘못하면 주민들이 모두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조건 82가구를 뛰어다니며 잠을 깨웠다"고 말했다.

홍천에서 지원 나왔다는 한 소방관은 "사방팔방 흩어지는 불길 때문에 인력이 분산돼 효율적인 진화작업이 어려운 상태"라며 "홍천.인제.양구 등 강원도 전 지역의 소방인력이 동원된 상태"라고 말했다. 불길이 번지지 않은 다른 마을 주민들도 초조함이 역력했다. 강현면과 양양읍 일대 모든 마을에 대피령이 내려진 상태지만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버릴 수 없어 호스와 바가지로 지하수를 퍼올려 지붕과 집주변에 물을 뿌려댔다.

직접 진화작업에 나선 정암리 주민 박병기(38)씨는 "태어나고 자란 집이 잿더미가 되는데 소방차만 기다릴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다.

낙산해수욕장 주변 주차장과 해변 곳곳에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노인들이 검게 치솟는 연기를 넋 놓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 노약자들은 양양읍 내 한 예식장에 마련된 임시대피소로 옮겨진 상태다. 양양군 관계자는 "불길의 방향을 예상할 수 없어 어디다 산불진화 인원을 배치해야 할지 판단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낙산도립공원은 4일 밤에 시작된 불길이 5일 오전에도 잡히지 않아 아침인데도 밤으로 착각할 정도로 연기로 가득 찼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역 모텔과 콘도에 투숙해 있던 봄철 관광객들은 5일 오전 불길이 거세지면서 일단 모두 대피했다. 인근 주민들은 오전 10시쯤 불길이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집안 정리를 하기 위해 돌아왔으나 오후 들어 불길이 다시 일자 재차 집을 떠나 대피했다. 이날 밤 늦게까지 양양 산불이 강풍을 타고 계속 확산되는 등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주민들의 불안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이날 오전 긴급 대피했던 김홍규(73.주청리)씨는 "칠흑처럼 어두운 새벽에 발생한 산불이 하루가 지나도록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며 "도대체 얼마나 더 태워야 불이 진정될 기미를 보일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어 "몇 해 전 물난리(수해)는 한 차례 겪었지만 이처럼 무서운 산불은 칠십 평생 처음"이라며 "오늘 밤도 뜬 눈으로 지새워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이날 양양과 속초를 잇는 7번 국도와 낙산도립공원 내부 도로는 현장을 빠져나가려는 관광객들과 주민들 차량이 뒤섞여 최악의 체증을 빚는 바람에 소방차들이 현장으로 접근하는데 애를 먹었다.

양양=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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