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따뜻한 연말정산은 1억보다 추억 만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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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지금부터는 행복프로듀서다. 대PD는 조직이 부여한 시한부 직위였다. 행복PD는 스스로 임명한 종신 작위다. 대PD가 뭐냐고 물으면 ‘대답해주는 PD’라고 얘기해 왔다. ‘사실은 대기발령PD의 준말’이라고 궁금증에 토를 달아주면 마음이 편했다. 모름지기 기대감은 부담감의 이복형제다.

 한 해를 돌아본다. 고교 졸업 39년 만에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받았다. 수상 소감을 하라기에 ‘자랑스러운 동문은 여러분들이고 저는 사랑스러운 동문일 뿐’이라며 위기를 넘겼다. 그날 지은 자작시. “상 받은 자 옆에는 상처 받은 자가 있다. 상 받은 시간 뒤에는 상처 받을 시간이 온다.”

 새해는 대학 입학 4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가을엔 학과동문회장으로 취임(?)했다. 회장은 평생 처음 듣는 호칭이다. 입학 당시 학과장이던 정규복 교수는 말씀하셨다. “자네가 커트라인이야.” 스무 살의 나는 답했다. “국어 하나 잘해서 국문과에 들어왔습니다. 이제부터 국어만 잘하면 되니까 졸업할 땐 첫줄에 서겠습니다.”

 지난 일주일이 길었다. 월요일은 ‘부자유친 회식일’이었다. 아들의 고교 친구들과 나는 2007년 1월 5일(아들 생일) 이후 이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끝날 때마다 파티,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는 부산 등지로 여행 가는 모임이다. “1억보다는 추억”이 슬로건인데 최종 파티는 내 영안실에서 갖기로 예정돼 있다. 그들이 음식을 나를 때 나는 누워서 인생을 돌아볼 참이다. 배경음악 제목은 ‘다 지나간다’. 내 휴대전화 컬러링 자작곡이다.

 문제의 월요일은 철종이의 한국은행 입사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문자를 확인하던 진원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주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데요.” 민주, 재은, 현준이도 술잔을 내려놓았다. 시험 기간이라 학교도서관에 있던 아들(오영)이 전송한 소식이다. 오영과 주희는 양가 부모가 인증한 사이로 7년째 교제 중이다. 음주가무는 종료됐고 묵념이 시작됐다. “너희도 부모님께 잘해라.” 2월 초의 부산여행을 기약한 채 우리는 총총히 헤어졌다.

 문상 내내 흐느끼는 주희를 안아주며 딱히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빠의 빈자리 작은 일부는 내가 채워줄게.” 아버지와 함께 산 기억이 없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아빠가 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부자유친 여행도 그 행동강령의 실천항목이다.

 행복프로듀서는 행복을 기획 생산하는 사람이다. 성탄절 아침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짐을 싸면서 살아있는 매 순간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방이 휑해지니 마음이 차오른다. 절로 입에서 랩이 흘러나왔다. “짐 싸 앗싸 짐 싸 앗싸”.

주철환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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