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그 새벽 나는 똑똑히 보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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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5일은 북한 공산군이 남침을 자행한 6·25 스물세돌. 1950년6월25일 새벽 4시, 북한 공산군은 일제히 38선을 넘어 남침을 자행했다. 그러나 그때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북한은『전쟁은 남한에서 먼저 도발했다』고 생트집을 부리고 있다. 그 날, 그 새벽 바로 38선에서 남침을 당한 사람 중에는 밭갈이 일만을 아는 순발한 농민에서 군관계 요원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많이 그날의 비극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북한이「탱크」를 몰고 쳐들어오던 그 새벽, 『나는 공산군이 남침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는 살아있는 증인을 찾아 그 날의 38선 현장을 돌아본다.

<춘성군 사북면|인민군 까맣게 남하|3시쯤 돼서 포격…「탱크」앞세우고|북쪽 신포에 1주전부터 병력집결>
춘천에서 북쪽으로 50리 떨어진 강원도 춘성군 사북면 원평리와 지암리·인남리는 38선이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고있다. 아직도「38선」표지말뚝이 우뚝 서 있는 원평리 주민들은 6·25가 터지기 2년 전에 성가신 공산군을 피해 바로 남쪽 산 너머 지암리로 피란 내려와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날 그 새벽 화천쪽에서 지암리로 남침해 온 공산군의 도보부대와 인남리를 거쳐 내려온「탱크」부대를 볼 수 있었다.
당시 한책 지암리청년대 조직부장이던 유근택씨 (62·농업)는 그 날 공산군의 남침을 직접보았다. 25일 새벽은 가뭄 끝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기억에 새벽 3시쯤이었다는데 갑자기 공산군의 포탄이 지암리 앞 들과 산에 퍼붓기 시작했다.
당시 춘천 북방 최전방에 주둔한 국군병력은 지암리에 1개 중대, 인남리에 1개 소대가 있었다.
평소에는 날씨가 흐리거나 밤이 되면 산 너머 공산군 진지에서 자주 지암리쪽으로 총질을 해왔기 때문에 25일 새벽 총소리와 포소리도 단순히 공산군의 노략질로만 생각했다.

<날 새자 마을엔 인민군>
그러나 이날 포성과 소총소리는 이내 그치지 않고 더욱 가까이서 들리고 있었다.
마을주민 최준복씨 (61)는 25일 새벽 애벌논을 매기 위해 평일보다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변소에 있다가 첫 포소리를 들었다. 최씨는 바로 집 앞 논바닥에 박격포탄 1발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이내 국군진지 쪽에서 또 총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보통 때 총소리와 다르다는 생각이든 최씨는 가족들을 깨워 마루 밑 방공호 속에 대피했다.
총소리와 포소리는 날이 새면서 차차 멎기 시작했다. 먼동이 훤히 틀 무렵 국군 제6진지가 있던 공동묘지 쪽에서『만세』소리가 들렸다.
최씨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공동묘지 쪽에서 새까맣게 내려오는 군인들이었다.
최씨는 이들이 마을 앞을 지날 때 비로소 인민군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인민군은 지암리를 그냥 지나가 가평 쪽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날 주민 유근창씨 (당시30세)는 인민군을 아군인줄 잘못 알고 길목에 나가 자기가 청년대원이라고 신분을 밝혔기때문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38선에서 북쪽으로 4㎞ 떨어진 신포리에서 6·25를 만난 정택량씨 (49·현사북면장)는 『6·25 1주일 전부터 공산군이 남침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주민들에게는 낮에도 통행금지를 내리고「탱크」와 야포부대는 마을을 거쳐 자꾸 남쪽 38선 근처로 내려가고 있었다. <신포에 낮에도 포금령>
24일 저녁 무렵이 되자 쌀과 취사도구를 실은 말(마)부대까지 신포에 도착했다b
인남리 김옥준씨(55·당시육본소속 전방요원)는 25일 새벽 몇 발의 박격 포탄이 마을앞산에 떨어진 직후「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38경계인 모진교를 넘어 남하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24일 밤 사북지서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가 25일 새벽 1시쯤 집에 돌아가 막 잠을 청하다 총소리가 나 지서에 달려갔다. 무진교 남쪽 국군 초소가 공산군에게 뚫렸다는 소식을 듣고 주민들과 함께 근처 산으로 피신했다가 멀리서 공산군이 남으로 내려오는 것을 볼수 있었다.
당시 인남리에는 7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난 65년 춘천「댐」이 건설되면서 마을 대부분이 수몰돼 현재 33가구가 살고 있는데 6·25때 인민군의 남침로였던 모진교도 이때 물 속에 잠겨버려 지금은 춘천에서 인남리로 가려면 나룻배를 타야한다.

<포천군 청산면|4시에 신호탄 세발|조금 후 한탄강 둑에「탱크」내습|한 인민군 "남쪽에선 총 한발 안쏘는군">
경기도 포천군 청산면 초성리 한문영씨(45·일명 성국)는 6월25일 새벽 38선 초소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군의 남침을 직접 겪었다.
초성리는 동두천 북방 12㎞ 지점에 있어 경기도 연천군과 포천군의 경계인 한탄강 남쪽 둑에 가까운 마을로 38선에서 불과 3백여m 남쪽에 위치했었다.
한씨는 그 날 새벽 2시부터 6시까지 마을 앞 38선 풀밭 초소에서 북녘 땅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당시 초가 50여 가구였던 이 마을 청년들은 군관계 요원들과 함께 잠복근무를 했다. 25일 새벽에는 부슬비가 내렸다.
한씨는 군용「만초」를 뒤집어쓰고 무장이라고는 수류탄 2개를 몸에 지닌 채 김중사라는 군인과 함께 있었다.
새벽 4시쯤이었다. 마을 동북쪽 약1㎞지점 38선 북쪽 대전리 뒷산「성재」(성현재)에서 번쩍하면서 소총신호탄 3발이 채 밝지 않은 어둠 속에 올라갔다.
신호탄은 초성리 상공을 날아 마을 앞 산쪽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꽝!』하는 포성이 한탄강건너 쪽에서 들려왔다.
한씨는 한탄강건너 북쪽 1㎞ 이내에 있는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쯤에서 공산군이 쏘아댄 포일 것이라 생각했다.
마을에서 외진데 위치한 신병준씨 (현재 동두천거주)집 부엌에도 포탄 1발이 떨어졌다.
조금 있으니「탱크」가 한탄강 남쪽 둑을 기어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한씨와 김중사는 공산군이 남침을 시작, 전쟁이 터진 것으로 판단하여 집으로 달아났다.
한씨집은 국도에서 50여m 떨어져 있었고 마을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지만「탱크」소리는 방공호 속 땅이 울릴 정도였다.
수많은「탱크」가 마을 옆을 지나는 경원국도를 타고 자꾸 남으로 내려갔다.
온 가족이 아침도 못해먹고 방공호 속에서 지내기 꼬박 6시간이었다.

<"평화가 왔다" 큰 소리>
상오10시쯤이었다. 한씨집 사립문 앞 우물가에서「탱크」「엔진」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뒤에 안 일이지만, 가로 세로 10m 가량 된 바가지 우물에 바퀴가 빠져「탱크」한대가 옴짝달싹을 못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인민군을 첫 대면한 것은 이우성씨(작고,6·25당시55세)였다.
이씨는 25일 상오10시쯤 통신망을 펴는 듯 집 앞 전봇대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인민군을 만났다. 애송이 인민군 한사람이『평화가 왔다. 아침 지어 먹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 마을 굴뚝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으나 조병섭씨 등 주민 10여명이 적의 포탄 아니면 소총에 목숨을 잃은 뒤였다.
장일휘씨 (51·농업)는 당시 육본정보요원으로 38선 접경에서 근무했다.
25일 상오0시 북한망 깊숙이 들어 갔다온 정보원이 중요한 보고를 해왔다.
청산면 장탄리까지 들어갔던 정중사는 마을길목마다 꽉 들어찬 인민군들이 밥을 먹고 요란스럽게 식기를 닦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을 길목마다 인민군>
한탄강 바로 건너 38선 이북 전곡리에 살던 천진달씨(55·농업·전민주당연천군당부위원장)는 24일 밤부터 공산군의「탱크」가 한탄강 가까이로 집결하는 것을 보았다.
천씨는 25일 새벽 포 소리에 놀라 가족과 함께 집을 나섰다가『우리는 연습 중이다. 남한에서 총 한발 안 날아오지 않느냐』고 인민군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기록을 보면 전곡 쪽에서 한탄강을 건너 초성리∼포천쪽으로 내려온 인민군은 제4사단 주공병력이었다.
초성리는 전쟁 중에 초가가 모두 불타 흔적도 없었으나 국군이 수복 후 떠났던 주민들이 다시 찾아들어 지금은 농가 1백25가구가 평화로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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