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자 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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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동양을 서구인들은 흔히『아침의 나라』로 부른다. 독일어의 「모르겐란트」(Morgenland)를 직역하면 『아침의 나라』지만, 실은 「아시아」를 뜻한다. 1829년 「베를린」에서 설립된 「동양학회」도 그 독일 명칭을 Morgenlandische Gesellschaft라고 했었다. 「아침의 나라」학회라는 의미이다.
「유럽」은 증기 교통기관을 발명하고 나서 그 열의를 동양항로 개척에 기울였다. 서구인에겐 풍습과 언어와 문화의 양식이 다른 동양에서 신경지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서구적 민주의의 팽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동양에서의 식민지 획득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동양에 대한 그와 같은 제국주의정책은 그들로 하여금 이 지역의 문화를 알아야할 필요를 느끼게 했다. 「동양학회」의 발상은 이런 것이었다.
그런 목적을 가진 학회로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1784년 인도의 「캘커타」에서 「윌리엄·존즈」가 창설한 「아시아」학회(Asiatic Society)였다. 「존즈」는 서구의 식민주의가 물질적인 것에서 저신적·지적인 것으로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후 1810년엔「페테르부르크」(오늘의 「레닌그라드」)에서 「러시아·아시아·아카데미」, 1822년엔 「파리」에서 「아시아학회」(Societe Asiatique), 독일의 「베를린」에선 「모르겐란트」학회 등이 진출했다.
오는 7월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동양학자회의(The lnternational Congress of Orientalists)는 그런 학회활동의 하나로 이미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첫 회의는 1873년9월1일(9일간) 역시 「파리」에서 열렸었다. 이 회의를 주선한 학자는 「레옹·드·로스니」(Rosny)교수. 그는 「이집트」학의 권위자였다.
그 당시 만해도 동양에 대한 서구인의 관심이란 주로 소「아시아」지역을 맴돌고 있었다. 그 후 이 회의는 거의 3연마다 「유럽」을 순회하며 열렸다. 「런던」·「레닌그라드」·「플로렌스」·「제네바」·「로마」·「이스탐블」 등. 1960년엔 「모스크바」에서 열렸으나, 우리 한국학자는 참석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1964년 「뉴델리」에서의 회의에야 비로소 참석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선 한국 고미술에 관한 발표와 함께 그 미술품들을 「슬라이드」로 소개했었다.
북한학자는 등록만 해놓고 그때 참석하지 않았었다.
「동양학자협의」는 2차 대전 이후 그 관심을 식민주의적 「어프로치」에서 돌려 순수한 문화연구에서 신경지를 찾으려 한다. 동양제국을 독립국으로 존중하며 그 문화적 가치의 신비감속에 심취해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뉴델리」회의에선 동부「아시아」를 두「파트」로 나누어 중국과 일본 및 「코리아」의 문화를 다루었었다. 일본과 「코리아」를 동일 범주로 분류한 것은 석연치 않다. 그만큼 「한국학」은 아직도 미흡하다.
이번 「파리」회의엔 남·북학자가 동석한다. 앞으로의 한국학은 그나마 남북으로 또다시 갈리게되지나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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