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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첫 소련입국한국인 유덕형 씨 기행문|유덕형(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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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내가「모스크바」에서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물론 연극이었다. 나는 냉전 이후 처음으로 소련 땅을 밟은 한국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국제연극회의에 참석한 연극인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연극은 그곳 국민들의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어 있는 듯 했으며 어느 예술분야보다도 활발한 것 같았다. 전국에 극장이 3백70개 있고 별도로 어린이 극장만 1백50개있으며 직업극단이 5백여 개나 된다고 했다. 「모스크바」에 있는 극장만도 30개라고 했다.

<새 경향 시각적 연극 도입>
내가 「모스크바」에 머무른, 6박7일 동안 볼 수 있었던 무대 공연물은 모두 6편이었다. 이중 「볼쇼이·발레」와「뮤지컬」『투란드트』를 빼면 연단은 4편이었다. 「말리」극장에서 본 「톨스토이」원작의『「표트르·이바노비치」황제』,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본 『강철을 만드는 사람들』, 「타캉카」극장에서 본『햄리트』, 「소브레메디크」극장에서 본 『「발렌틴」과 「발렌티나」등.
내가 소련의 연극을 본 것은 물론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7, 8년 전「뉴요크」에 온「모스크바」예술극단의 『「크렘린」굴뚝』『벚꽃동산』『3자매』『빈민굴』등을 본 일이 있었다. 그 때의 느낌은 소련의 연극이 완전히 「리얼리즘」연극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에 다시 본 소련연극에서도 그 「리얼리즘」은 재확인되었지만 한가지 새로운 경향 즉 화술중심의 연극에서 시각적인 연극이 도입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각적인 연극은 아직도 소수인 것 같았으며 더구나 「아방가르드」「언더그라운드」또는 실험연극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점은 지금까지「러시아」사람들이 세계 연극 사에 있어서 전위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에 비하면 「아이러니컬」한 것이기도 하다.
서구의 전위 또는 혁신적인 연극은 개성이 뚜렷한 몇몇 개인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보편성이 없고 거기에 공감할 수 있는 관객은 특수한 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소련은 모든 것이 「매스」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회이며 연극도 전 대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몇몇만의 새로운 시도란 있을 수 없는 것 같이 느껴졌다. 예술의 모순성이란 개인주의 사회에서나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어디서나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현대적 감각 『햄리트』공연>
단 1주일간의 여행자로서 4개의 무대만 보고 소련의 연극을 말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련의 연극은 비록 세계연극사조로 보아서는 뒤떨어지는 「리얼리즘」연극을 아직도 추구하고있다 할지라도 세계적 수준에 올라있으며 특히 연기는 뛰어나다고 확언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근대연극연기의 기초를 이룬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내면적 연기론이 탄생된 본 고장으로서 오랫동안 이 하나의 방법론만을 정착시켜 이제는 익을 대로 익었기 때문이다.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단젠크」와 함께 창립한 「모스크바」예술극장이 아직 옛 모습 그대로 남아 기념되고 있다는 것은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러시아」연극에 끼친 영향과 공적을 봐서도 당연히 그렇게 할만한 것이라고 느껴졌다.
내가 본 4편의 연극 중에서는 「타강카」극장에서 본 『햄리트』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세계 연극사조적인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장 현대적인 것이었고 감각적이면서도 무게가 있고 안정된 것이었다
특히 이 작품은 내가 2년 전에 연출한 『알라망』과 비슷하게 그들의 영상을 이용하는 등의 시각적 미학을 추구한 점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젊은「그룹」의 극장이라는「소브레메니크」극장에서 본 『 「발렌틴」과 「발렌티나」』도 내용과 형식은 그대로 고전적이었다. 다만 미술은 무대에 자전거를 거꾸로 매달아놓고 「벨」로 이용하는 등의 전위적인 취향을 약간 엿볼 수 있었다. 「말리」극장에서 본 『「표트로·이바노비키」황제』는 전에도 소개한바 있는「인민배우」「이노켄티·스모크투느프스키」의 명연기도 명연기려니와 그 인기가 상장을 초월하고있어 인상적이었다.

<무대전환·조명 뛰어나>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본『강철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떻게 기술적으로 요란을 띠는지 연극자체는 아예 보이질 않았다.
2시간 동안의 연극에 무대가 35번이나 전환될 정도였는데 특히 조명은 아주 뛰어났다.
한 예로 용광로 장면에서 인부가 석탄을 넣을 때 불꽃이 확 일어나는 것까지 조명으로 처리했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연기를 뿜어내는 「포그·머쉰」이 공교롭게도 우리가『초분』공연 때 썼던 것과 똑같은 기계였다는 것이다.
하루는「고르키」가의「모스크바」예술극장에 가서 공연이 아닌 「워크숍」비슷한 「리허설」을 볼 수 있었다. 20대의 연출가가 완전히 작품을 만들어 놓은 다음 1급의 노 연출가가 평가를 해가면서 손질을 하고 있었다. 연극이「그룹」예술이긴 하지만 연출 한 분야만을 집단으로 작업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구에서는 각 개인의 개성이 다르고 경향이 달라 집단작업이란 과거부터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사회에서는 이미 오래된 것 같았으며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뚜렷하기 때문에, 즉 그들 나름의 공동의 신화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았다. 예술이 공감을 주는 것은 거기에 내포되어있는 것이 관객의 것과 일치할 때이다. 연극은 그 사회 공동의 신화를 추구하는 것이며 또 예술의 창조에는 자유가 필요하다고 할 때 소련의 연극은 신화가 있는 대신 창작의 자유가 없으며 서구의 연극은 자유가 있는 반면 공동의 신화가 없는 것이 대조적이라고 느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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